인류는 고대부터 자연에 대해 생각해 왔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 흐르는 강물,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 바람과 내리는 눈과 비, 순환하는 계절을 바라보면서 모든 자연현상에 대해 일정한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아갔다. 질서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자연 뒤에 감추어진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 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호기심을 자극했고, 세상 이치를 이해하는 탐구로 이어졌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러한 자연을 ‘코스모스(질서 있는 세계)’라 이름 붙였다. 이는 자연이 무작위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과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계절 변화는 태양 고도와 지구 자전 및 공전 결과이며,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중력이라는 보편 힘에 기인한다. 이러한 자연현상들은 수천 년간 인류가 과학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 이성은 ‘왜’라는 물음으로 시작되었다. 그 질문은 사유로 이어졌고, 수학으로 계산했으며, 탐구는 학문이 되었다. 하지만, 탐구는 언제나 자연현상과 일치했을까? 장자는 이 질문 앞에서 답을 얻고자 했다. 장자는 자연은 인간이 통제하거나 해석하는 틀에 가두어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 자연은 스스로 때어나 스스로 자라다 스스로 소멸해 가는 것(自然)이기 때문에, 인간 이성으로 완벽히 파악하거나 정형화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장자는 “도(道)는 항상 작위(무위 無爲)가 없지만, 이루지 않음이 없다” 즉 무불위(無不爲)라고 하면서 제후와 임금이 능히 이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저절로 생성, 변화될 것이다. 최고 덕, 즉 상덕(上德)은 인위적 작위함이 없으니, 그것을 실천하겠다는 의지에 의해 실행에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무이위(無以爲)로 자연이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여하지 않으면서, 그저 스스로 방식대로 흐른다는 뜻이다. 자연 질서란 강제되지 않은 조화이며, 그 질서를 억지로 분석하고 구조화하려는 시도는 자칫 본래 지니고 있는 ‘도’를 흐릴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이는 인간 본성일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말한다. “가장 훌륭한 지혜란 사물과 더불어 자유롭게 유유히 노니는 것이다.” 인간이 이성으로 탐구하면서 자연 질서와 조화를 이루려면, 억지로 자연을 해석하고 바꾸려 하기보다는, 질서 안에서 자기를 비워내고 ‘무위’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인간은 자연 일부가 되고, 자연은 더 이상 관찰 대상이 아니라 ‘함께 흐르는 존재’가 된다. 장자에게 있어 진정한 앎이란, 자연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자연이 만든 흐름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자유롭게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성에 의한 탐구가 진정 의미 있으려면, 그것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성찰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로 ‘소요유(逍遙遊)’에 다다른 경지다. 최근 지구 곳곳에서 대형 산불과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미세 플라스틱) 등에 의해 생태환경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필자가 확인한 보도에 따르면 한반도도 그 심각성이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섭리처럼 보인 자연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인류세에 의해 6차 대멸종이 가까워졌다는 경고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장자는 자연은 어떤 의도나 목적에 의한 산물이라기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 그 자체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인간은 자연 질서에 귀 기울이되,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빌려 쓰고 있는 지구를 지키는 것은 겸손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이성은 무위 정신을 품어야 한다. 장자 생각을 읽으며 무너져가는 생태환경을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