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누가 나에게 자루없는 도끼를 줄텐가 내가 하늘을 떠받친 기둥을 찍으리라'  원효가 승려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부르고 다닌 노래다. 소위 '몰가부'라고 칭한다. 원효는 승려이자 불교 사상가로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승려로서 파계라는 극약처방도 불사한 이유를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   삼국유사에는 몰가부를 외치는 원효를 눈여겨 본 태종이 요석공주와 짝을 맺어줌으로써 설총이 태어나고 나라의 동량이 된 것으로 나와있다.   그러나 몰가부를 유사의 해석대로 귀한 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으려 한 것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역사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흔히 자루없는 도끼는 홀로된 과부를 상징하고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나라의 인재로 보는 기존의 해석으로는 원효를 올바르게 이해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는 자장의 주도하에 율법이 강조되던 시절로 승려로서의 파계는 사문에서의 축출이자 비난의 대상이다. 불법의 구도에 목말라 하던 젊은 승려가 몰가부를 외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의도를 살펴야 한다. 몰가부는 시경 빈풍 제15권 벌가(伐柯)에서 연유한다. 벌가여하 비부불극 취처여하 비매불득. 벌가벌가 기칙불원 아구지자 변두유천이다.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어떻게하나. 도끼가 아니면 밸수가 없네. 아내를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중매가 아니면 얻을 수 가 없네. 도끼자루로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방법이 멀리있지 않네. 님을 맞으려면 예절에 맞게 음식을 차려 실천해야 하네.   원효는 문천교를 지나다 왕의 부름에 물에 빠져 옷을 말리기 위해 요석궁으로 들어가 머무르고 설총이 태어난다. 이때가 655~661년 즈음이다.   설씨 족보에도 설총의 출생을 655년으로 기록하고 있듯이 요석의 남편 김흠운이 전사한 시점이 655년 9월 조천성전투이고 태종의 등극이 654년이기에 최소한 655년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만남에 대해 태종의 생각과 원효의 목적이 일치했다고 보기 이전에 원효가 염원한 도끼자루가 무엇이며 하늘을 떠받칠 기둥이 무엇인가를 감안해야 한다.   원효는 자장이 추구하는 율법중심의 귀족불교를 혁신해야 겠다는 새로운 불법의 방향에 목말라 했고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냉대를 타파하는 길을 하늘의 기둥과 도끼자루에 담았다고 봐야 한다.   천주는 기존의 귀족불교이자 타파되어야 할 사회제도요 불법의 방향이며 사회개혁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도끼는 폐습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이요 권력이다. 그러기에 다소 과격한 뜻인 찍다는 의미인 작(斫)을 넣어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찍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태종 역시 등극 이후 원광 자장으로 이어지는 국정 자문세력의 단절을 위해 대안세력으로 원효를 선택했다고 보는게 통치자로서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원효는 파계에 대한 고뇌와 비난을 벗어나기 위해 661년 2차유학을 감행하다 해골물사건으로 깨달음을 얻고 자유인으로 돌아온다. 원효가 주창한 일심 화쟁 무애는 그가 꿈꾸던 구도의 길이며 나아갈 방향이었다. 우리는 고승전이나 유사 곳곳에서 그가 득도 이전에 겪었던 고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5두품이라는 신분의 한계속에 원광이나 자장이 주관하는 법회에 참석조차 거절당하고 출가후 고향언저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지식인이 겪는 수모와 아웃사이더로서의 처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파계와 득도 후에는 분황사에서의 왕성한 저술 활동과 662년 김유신이 소정방의 구원활동에 나섰다가 위급한 상황에 놓이자 송아지와 난새에 대한 뜻풀이를 원효에게 맡길 정도로 그는 이미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잡았슴을 알 수 있다.   송고승전에서도 금강삼매경의 주석 작업에 얽힌 대안법사와의 일화를 비롯해 황룡사 법회에서는 지난날 100개의 서까래에도 끼지 못하더니 한개의 대들보가 되었다는 것에서 자장의 세력에서 벗어난 그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원효의 몰가부는 신분상승을 위한 단순한 구애의 노래가 아니다. 귀족중심의 불교를 타파하고 민중과 함께하는 올바른 불법을 위한 개혁의 열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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