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신기루를 좇곤 하였다. 그때는 이룰 수 없는 꿈일지언정 그것을 눈앞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쉽사리 잡을 수 없는 허상, 신기루가 지닌 정체가 아니던가. 그 몽환적인 그림자에 반하여 지난날 질곡의 세월을 용케 견뎌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 많은 희망 중에 으뜸은 내 집 마련이었다. 이런 필자 경험은 현재 서민들도 겪고 있다. 집 한 칸 마련하기가 녹록치 않잖은가. 그동안 침체했던 부동산 경기였다. 이런 사회적 현상이 얼마 전 치른 대통령 선거를 맞아 판도가 다소 바뀌었다.    필자가 사는 인근 도심지, 수도권 일부에서 부동산 값이 들썩인다는 소식이다. 왠지 이 뉴스가 썩 반갑지 만은 않다. 서민들 절실한 소망인 내 집 마련 꿈이 점점 멀어지기 때문이다. 오랜 시일 셋방살이를 면치 못한 서민들에겐 내 집 마련은 매우 절박하다. 돌이켜 보니 셋방살이 설움은 필설로도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고초가 심했다. 젊은 시절 셋방살이를 한 적 있다. 그 땐 현대처럼 오피스텔, 아파트, 원룸 등이 아니었다. 방 한 칸에 딸린 손바닥만 한 연탄아궁이가 놓인 부엌, 마치 닭장처럼 지어놓은 열악한 주택 환경이었다.    신혼 시절 필자가 처음 셋방살이를 한 곳은 주인집과 총 6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당이 꽤 넓은 집이었다. 재래식 공동 화장실이 집 마당 한구석에 자리했었다. 아침이면 그 앞엔 늘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사실 화장실에서 대, 소변을 볼 때마다 문 앞에 서있는 사람들을 의식 안 할 수 없었다. 설사라도 배설시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어 서다. 뿐만 아니라 공중 수도이다 보니 물을 쓸 때도 주인 눈치를 살펴야 했다. 물 한 방울도 마음껏 쓸 수 없었다. 또한 세입자는 집안에서 아이들이 떠들지도 못하게 주의를 줬다. 시끄러운 아이들 소리가 행여 주인집 심기를 건드릴까봐 노심초사 했다. 이런 형국이니 얼마나 힘든 셋방살이였나. 요즘은 집 주인 간섭을 받지 않는 주거 형태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 집 없는 불편함은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빌라 사기사건만 해도 그렇잖은가. 전 재산을 집주인의 사기극에 잃은 세입자들, 그 고통과 절망은 겪지 않았어도 미뤄 짐작할 만하다. 집 없는 서러움을 논하노라니 문득 칼새의 생태가 떠오른다. 칼새는 여름에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철새다. 이 새가 지닌 특이한 점은 암벽 균열이나 그 벽면에 둥지를 트는 일이다.    또한 높은 산에서는 화분과 식물 줄기 및 나뭇잎을 자신 침으로 접착시켜 밥그릇 모양인 둥지를 만들어 옆면을 암벽에 밀착시킨다. 이렇듯 한낱 미물인 칼새도 식물 줄기, 잎 등만 있으면 몸에서 분비 되는 침을 자재삼아 뚝딱 둥지를 튼다. 그러나 우린 어찌 오두막 한 칸도 마음 놓고 장만 할 수 없단 말인가. 그래서인지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라는 노래 가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저 푸른 초원 위에/그림 같은 집을 짓고/사랑하는 우리 님과/한 백년 살고 싶어봄이면 씨앗 뿌려/여름이면 꽃이 피네/가을이면 풍년 되어/겨울이면 행복하네’<하략> 누구나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멋진 집을 짓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 무엇을 더 바랄까. 화가, 건축가로도 유명한 프랑스에서 18세기 세계 최초로 아파트를 건축한 ‘르코르 뷔지’이다. 그는 평소 “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 라고 언술 했다. 이는 집은 인간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 관계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꿈은 요원하기만 하다. 현대 젊은이들은 내 집 마련을 위하여 영혼까지 끌어 모아야 할 정도다. 오죽하면 이런 사회적 현상을 일러서 ‘영끌족’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을까. 이 말이 회자되는 세태에 사노라니 왠지 칼새가 둥지를 짓는 기술마저 마냥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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