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청성에 있으면 청성 땅에 침 뱉지 않아야 한다네(自爲淸城客 不唾淸城地 자위청성객 불타청성지/ -유의양, 『북관노정록』). 유의양이 북방을 여행하며 남긴 『북관노정록』 한 구절이다.    외지에 몸을 두고 있을지라도 자신이 한 행위와 태도에 따라 공간에 대한 품격과 의미가 다르다는 뜻이다. 여행 중 생각을 가볍게 쓴 구절이 아니다.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며 만들어 가야 한다는 선언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간혹 “세상 중심은 나일까?”라는 물음을 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자신만을 위한 자기중심 사고가 아니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과 『도덕형이상학 기초』에서 인간을 ‘자율적 존재’로 규정했다.    인간은 단순히 외부 명령에 반응하는 피동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도덕법칙을 부여하고 그 법칙에 따라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성이 있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칸트는 이 능력을 ‘자율(Autonomie)’이라 불렀으며, 도덕 실천 토대라 보았다. 즉, 인간은 “남들이 보는 대로” 혹은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윤리적 판단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 중심은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책임 있게 응답하는 ‘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칸트를 만났을 때 “自爲淸城客 不唾淸城地”는 새롭게 해석된다. 유의양은 청성 땅에 머무는 자는 그곳 규율이나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스스로 처신을 단정히 하여 장소에 깃든 혼에 대한 품격을 높이고 세계에 대한 태도를 새롭게 규정하였던 것이다. “몸이 청성에 있으면 청성 땅에 침 뱉지 않아야 한다네”는 외부 환경을 스스로 도덕에 대한 자율성으로 가늠하고 재해석하는 실천적 선언이다. 근대 이후 존재론은 공간이 단지 물리적 장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체애 의해 작용하는 체험과 인식에 따라 의미화된다고 본다. 하이데거조차도 “존재는 거주함”이라 했다. 인간이 어떻게 그 자리에 ‘머무느냐’에 따라 공간은 단순한 곳(place)이 아니라 장소(topos), 곧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자리가 된다고 하였다. 유의양이 말한 “청성 땅에 침 뱉지 않아야 한다네” 선언은 외부 공간 장소에 깃든 혼에 대한 적합한 윤리이자, 자신 삶을 통해 공간을 재정의하는 인식론 행위다. 이 말은 단순히 예절을 지키라는 옛 교훈이 아니라, 스스로 의지로 자기 행동을 조절하는 ‘나’라는 행위자 선택이 외부 세계를 의미 있게 만든다는 철학적 통찰이다. 우리는 세상 중심이 아니지만 또 세상 중심이 되기도 하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현상계 주체로, 한 사물에 지나지 않지만, 도덕 세계에서는 법칙을 스스로 세우는 주체로 중심이 된다. 즉, 내 태도와 판단, 실천이 도덕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청성 손님이다’는 인식을 통해 스스로 태도를 정립할 수 있다면, 나는 이미 내 안에 있는 도덕률에 따라 세계 중심에 있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세계 중심은 나다’라는 말은 주체를 가지고 있는 주인 됨에 대한 선언이다. 이는 오만이 아니라 책임감이다. 내 존재 방식이 곧 세계 존재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저 하기 나름이다” 이 문장은 동양 선비정신과 칸트 실천 이성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곧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가 삶에 대한 의미를 결정한다는 선언이다. 청성 땅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청성 땅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내 삶을, 나아가 세계를 재구성한다. 결국 ‘세계 중심은 나다’는 말은, 내가 우주 중심이라는 자만이 아니라, 내가 나를 중심에 세울 때 세상은 비로소 올곧게 정렬된다는 성찰이다. 그리고 그러한 나를 칸트는 ‘자율적 인간’이라 불렀고, 유의양은 그를 “청성 손님”이라 불렀다. 다른 시대, 다른 언어일 뿐, 그 핵심은 같다. 청성에 침을 뱉지 않는다는 태도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지 말해준다. 모든 일은 결국, 나 하기 나름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