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조선조에서 가끔 있었던 상례(喪禮)의 절차 중 하나인 ‘시묘살이’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이 탈상을 할 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막을 짓고 지내면서 묘를 돌보고 제사를 올리는 일을 말한다. 
 
3년이라는 기간은 혼자 먹고 활동할 수 없는 유아기까지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기간이다. 예전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 동안의 시묘(侍墓)살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아무나 실천할 수 없는 일이 시묘살이였다. 
 
그 당시에도 시묘살이를 마친 자식은 그의 효심을 높이 평가하여 어디에서나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조 최고의 학자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자식 교육을 위해 서화를 가까이하며 모범을 보였고 사임당이란 당호를 직접 지었는데 이것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이자 중국 최고의 현모양처로 이름난 태임을 본받겠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어머니로부터 남다른 교육을 받은 율곡은 13살 어린 나이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오를 때까지 아홉 번이나 급제해 구도장원공(九渡壯元公)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세상 그 누구가 자기의 부모를 존중하지 않으랴 만은 율곡 역시도 어머님에 대한 효심은 지극하였다. 신사임당이 지병으로 마흔아홉에 세상을 떠났지만 율곡은 외지에 나가 있어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님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뒤늦게 도착한 율곡은 파주 자운산에다 장사지내고 그로부터 3년간 시묘살이에 들어간다. 부모님의 죽음이 자신의 불효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 수염이나 머리도 깎지 않았다. 눈물과 한 서린 생활로 3년 상을 치르고도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채워지지 않아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하고 그 후 한양 본가로 돌아가 학문에만 정진했다고 전해진다. 
 
스물아홉에 대과 장원급제를 차지한 율곡은 관직에 머물며 실천하는 조선의 정치가이자 수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율곡의 뛰어난 사상과 철학을 모아놓은 율곡전서 중에서 제왕의 학문을 정리한 성학집요와 후학을 위해 지은 격몽요결은 율곡의 높은 경륜을 증명하는 저서로 손꼽힌다.
정조 임금은 율곡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오죽헌 옆에 어제각(御製閣)을 지어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과 율곡이 어린 시절 사용했던 벼루를 보관하게 했고 벼루 뒤에는 율곡을 찬양하는 글을 친히 기록했다. 후대 왕조차 존경한 조선 최고의 대학자 율곡 이이를 백대의 스승으로 길러낸 지혜로운 어머니 신사임당이야말로 3년의 시묘살이로도 늘 부족함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수년 전 TV 체널 인간극장이란 프로그램에서 유범수씨의 시묘살이 이야기가 방영되어 화제가 되었다. 그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어머니의 무덤을 지켰다. 살아계신 어머니를 모시듯 매일 세 끼씩 상식을 올리고 책을 읽어드리는 등 우리 모두는 유범수씨에게서 효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깨달았고 서구화의 영향과 이기적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현시점에 많은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