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어머니를 봉양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전 요양 병원으로 모셨다. 그곳을 찾아갈 때마다 날로 병색이 짙어지는 어머니를 뵙는다. 그런 어머니를 뵙고 오면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발길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 이 뿐인가. 집에서 차마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조차 괜스레 죄스럽다.    어머닌 이젠 죽조차도 제대로 섭생을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잠자리에 들어서 눈만 감으면 피골이 상접한 어머니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밤을 꼬박 지새우기 일쑤다. 평생을 가난 속에서 여러 자식들을 키우고 양육하느라 등골이 휜 어머니 아닌가. 젊어서는 복사꽃처럼 아리따운 어머니였다. 이젠 그 모습은 간 곳이 없다. 병마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바람 빠진 풍선마냥 작아지는 어머니다. 여태껏 어머니의 하늘같은 은혜를 만분의 일도 못 갚은 채 살아왔다. 이를 깨닫고 효를 다하려 하나 어머닌 당신 삶을 마감할 준비를 서두르고 계시다. 이런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서 지금 도저히 글을 못 이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젊은 시절 어머닌 말 한마디도 남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못하던 분이였다. 자신에겐 엄격하지만 타인에겐 늘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분이었다. 어려서 어머닌 밥상머리에서 항상 우리들에게, “ 남을 위하는 게 자신을 위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절대 말 한마디라도 해롭게 하지마라”라고 타이르곤 하였다. 어머닌 자식에게 맑고 참다운 영혼을 불어넣어주는 분이다. 자신은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들만큼은 남 앞에서 꽃으로 보이고 새싹으로 보이길 염원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은 돌보지 않고 아낌없이 자식 위해 헌신과 희생을 서슴치 않았던 분이다. 이런 어머니이기에 누구나, “어머니!” 라고 입 속으로 가만히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여도 콧날이 시큰하며 눈가가 젖기 마련 아니던가. 이런 어머니를 부산에선 오늘 50대 여인이 80대 노모를 살해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이 소식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어찌 낳아주고 키워준 어머니를 자식 손으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한단 말인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어머니라는 존재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식은 없다. 이는 패륜을 넘어서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랴. 설령 타인이 자신의 부모를 해하여도 평생 철 천지 원수로 삼을 일 일진데, 어찌 스스로 어머니를 해친단 말인가.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 바꿔서 어머니 살해범 본인도 자녀들이 있을 터, 그들이 이런 반인륜적인 일을 대물림 하여 자신을 죽인다면 어쩌겠는가.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 아니던가. 참으로 하늘이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는 무엇으로든 성공한다. 이는 하늘이 정해준 진리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뉴스를 대하노라니 강인엽이 부른 ‘그리운 어머니’ 라는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진다.‘엄마가 보고플 때/엄마 사진 꺼내 놓고/엄마 얼굴 보고 나면/눈물이 납니다/어머니 내 어머니/사랑하는 내 어머니/보고도 싶고요/울고도 싶어요/그리운 내 어머니’ 이 노래를 부르노라니 미리 촬영해둔 어머니의 영정 사진이 생각났다. 그 사진을 꺼내어 앞에 놓고 이 노래를 부르노라니 마음이 울컥하여 그쳤던 뜨거운 눈물이 또 주체할 수 없이 흐른다. 이 노래는 곡조도 애조를 지녔지만 가사역시 음미할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배어 있다.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지난날 어머니랑 함께 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사춘기 때 어머니의 꾸중에 반발했던 기억, 결혼하여 나 살기 바빠서 어머니께 소홀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이제라도 뒤늦게나마 뉘우치고 어머니께 효도를 다 하려하나 더 이상 어머니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섬망 증세도 보이고 자식도 못 알아보는 어머니 아니던가. 어머니께서 머잖아 우리 곁을 떠난 후, 생전에 못해드린 효도 때문에 얼마나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할까? 이 생각을 하노라니 이 노래가 왠지 예사롭지 않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라고 그 이름을 지금부터 입 속으로 가만히 부르기만 하여도 살을 저미는 듯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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