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이라는 도시를 떠올리면 여전히 거대한 제철소의 굴뚝과 붉은 쇳물이 흐르는 산업 현장이 먼저 그려진다. ‘철의 도시’라는 수식어는 50년 넘게 이 도시의 정체성을 규정해왔다. 하지만 지금 포항은 그 철의 이미지를 서서히 걷어내고 있다. 배터리 산업, 그 조용한 변화가 도시의 체질을 바꾸고 있다.단순한 산업 다변화를 넘어서는 움직임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포항은 이차전지 산업을 중심으로 한 첨단 산업 도시로의 전환을 본격화했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로 지정되고, 수조 원대 민간투자를 끌어들인 것은 단순한 성과 그 이상이다. 이는 포항이 더 이상 기존 산업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새로운 생존 방정식을 찾기 위한 선택이다.눈에 띄는 것은 산업 유치의 방식이다. 예전처럼 공장 하나 짓고 끝나는 식이 아니다. 소재부터 재활용까지 전주기 시스템을 갖추고, 대학·연구소·기업이 연결된 완결형 산업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 여기에 실습 중심의 인재 양성과 글로벌 기술 교류까지 더해지니, 변화의 방향은 분명하고 구체적이다.‘기술 도시’, ‘배터리 허브’, ‘MICE 거점’ 같은 말이 결코 허울 좋은 수식어에 그치지 않게 하려면, 지금의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균형을 지켜야 한다. 인프라는 무조건 넓힌다고 되는 게 아니다. 산업 생태계는 기술, 인력, 정주 여건, 행정의 유연성이라는 네 축이 맞물려야만 제대로 굴러간다.중요한 건 사람이다. 아무리 좋은 시설과 제도도 결국 그걸 운영하고 발전시킬 주체는 사람이다. 포항이 ‘3+2+2’ 교육 모델로 고교-전문대-대학을 잇는 이유도, 단기 유입 인재보다 지역에 남아 정착할 인재를 키우겠다는 전략에서 출발했다. 청년이 떠나지 않는 도시, 연구자가 머무르는 도시가 될 수 있다면, 산업은 자연히 따라오게 된다.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서울이나 수도권의 중심성, 기존 대기업들의 입지 전략, 해외 투자 환경과의 경쟁 등을 생각하면 포항의 실험은 녹록지 않다. 특히 배터리 산업은 기술 수명이 짧고, 글로벌 공급망 변동성도 크다. 여기에 고준위 재활용 문제나 환경 규제도 더 정교한 정책적 설계가 필요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항은 ‘늦었지만 제대로’ 가고 있다. 기반 기술은 이미 갖췄고, 산업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으며, 행정과 민간의 협력 방식도 점점 유기적으로 변하고 있다. 특히 컨벤션센터와 과학관, 그리고 국제 엑스포 개최 계획은 기술 중심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외부에 각인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포항의 전략이 특별한 건, 중앙정부 정책과도 절묘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기회발전특구, 첨단전략산업특화단지, 배터리 산업 R&D 육성 등 중앙정부의 핵심 산업 전환 흐름을 선제적으로 흡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역과 중앙의 흐름이 일치할 때, 도시 발전은 훨씬 가속이 붙는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도시의 이미지 변화다. 여전히 많은 국민에게 포항은 철강 도시로 각인돼 있다. 이 이미지를 바꾸는 것은 산업보다 더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과학축제, MICE, 글로벌 박람회, 과학관 조성 같은 ‘문화와 기술의 결합 전략’은 그 해답에 근접한 시도다. 도시는 눈에 보이는 구조만큼, 보이지 않는 인식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포항이 진짜 바꾸고 있는 것은 단순한 산업 구조가 아니다. 한 도시가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 지역이 첨단 산업을 다루는 태도, 지방이 스스로 경쟁력을 만들어내는 구조다.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포항은 대한민국 산업 전환의 상징 도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 변화는 단지 지역 정책의 사례가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정책의 방향타로 기록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