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19대 임금 숙종 대왕이 어느 날 민심을 살피려고 평복차림으로 밀행을 다니던 중 경기도 수원천 부근을 지날 무렵 허름한 차림의 젊은 부부가 관 하나를 옆에 두고 울면서 땅을 파고 있었다.    숙종이 깜짝놀라 가까이 가서 보니 광 중(壙中)에는 물이 가득하였고, 가난하고 착한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계속 울고만 있었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리석은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묘를 쓰려면 산에다 써야지, 어찌 물이 솟아 나오는 냇가에 쓰려고 하는지 숙종은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임금은 그들 부부에게 "여보게! 묘를 쓰려면 산으로 가야지 왜 이렇게 물가에 묘를 쓰려고 하는가?" 하면서 물어보니 저희들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오랜 병환 끝에 어제저녁에 돌아가셨는데 아침에 저쪽 언덕에 사시는 갈처사라는 분이 찾아와서 평소 저희들의 효심에 놀랐다 하면서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다 장사(葬事)를 지내면 큰 발복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이 고을에서 꽤나 유명한 지관이신데 어찌 이러한 곳에 어머니의 묘터를 잡아주었는지 그 연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임금은 수행해온 신하들에게 어리석고 불쌍한 이 부부에게 즉시 쌀 삼백 석을 내려주고 국풍[왕실 전속 풍수]을 불러 다시 묘터를 잡아주라고 명령하였다.    임금은 이러한 흉지를 잡아 준 지관에게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 찾아가니 지관은 높은 언덕 자락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임금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지관에게 "나는 한양에 사는 이 서방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이 지방에서 꽤나 명성이 있는 지관이라고 들었건만 어찌하여 착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물이 솟아나는 냇가에다 묘터를 잡아주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혼잣말로 개코도 모르면서 웬 참견이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저 자리는 시신이 광 중에 들어가기도 전에 쌀 삼 백석이 생기는 금시발복 할 자리며 나라의 국풍이 다시 좋은 자리로 옮겨줄 터란 말이오. 내 저들 부부의 평소 효성에 감동하여 자리를 잡아 준 것인데 무엇이 잘못되었소." 하고 반문하였다.    숙종은 금방 자신이 조치한 내용과 똑같았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금은 또다시 "영감님은 그렇게 잘 알면서 호의호식하지 않고 어찌하여 이런 누추한 곳에서 살고 있소?" 그러자 지관은 껄껄껄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잘 살려면 남을 속이고 거짓말하면서 나쁜 짓을 해야 하는데 가급적 그런 짓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곳은 비록 초라한 오막살이지만 훗날 나라의 임금이 찾아올 집인데 이보다 더한 명당이 어디 있단 말이요" 그럼 임금이 언제 찾아옵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잠시 머뭇거리다 손가락 마디로 일자를 꼽아보고는 앞의 선비가 바로 임금이란 걸 알고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숙종이 감동하여 갈처사! 내가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소 하여 점지한 곳이 지금의 서울 서북쪽의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이며 그 후 숙종 대왕은 갈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고 홀연히 떠났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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