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힐 것 같은 폭염과 극한 호우가 지속되는 여름날이다. 이렇듯 기상이변에 시달리노라면 입맛을 잃기 십상이다. 이럴 때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아 주는 반찬으로써 열무김치를 꼽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냉장고가 없던 지난 시절, 어머닌 어떻게 열무김치를 그토록 맛깔스럽게 담갔는지 궁금하다. 보리쌀을 푹 삶아 절구에 빻아 체에 거르고, 풋 고추를 썰어 넣고 마늘 몇 조각 짓이겨 넣은 게 양념의 전부였잖은가.
어린 날 어머닌 여름철만 돌아오면 열무김치를 반찬으로 콩국수를 해주곤 하였다.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얇게 밀어서 가지런히 국수를 썰었다. 이것을 삶아 그릇에 담은 후 콩물을 부어서 그 위에 고명으로 오이를 채 썰어 얹는다. 
 
이렇게 만든 구수한 콩국수를 먹을 때 그 쫄깃한 식감의 면발 맛은 일품이었다. 더구나 국수 위에 새콤한 열무김치를 척척 걸쳐서 먹는 맛이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진미 그 자체였다.
어디 이뿐인가. 필자 세대면 누구나 지닌 추억일 것이다. 겨울철 군고구마랑 함께 먹는 김장 김치 맛은 또 어떠했나? 마당가 한 구석에 짚 이엉으로 만든 지붕을 뒤집어쓰고 묻힌 김장독이었다. 어머닌 해마다 김장을 담가 이것에 저장 하곤 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밤, 살얼음이 동동 뜨는 동치미를 항아리에서 꺼내어 달콤한 고구마랑 먹을 때 그 맛을 어찌 필설로 다 형언할 수 있으리오.
요즘이야 온갖 음식들이 스마트 폰 앱 만 누르면 배달되어 오는 세상이다. 뿐만 아니라 돈 몇 푼만 쥐고 나가면 마트 진열대 위에 포장된 김치를 종류별로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난 기업에서 만들었다하여도 정성이 깃든 손맛을 어찌 따를 수 있을까. 그래 필자는 지난날 어머니 손맛을 흉내 내어 김치만큼은 꼭 직접 담가먹는다.
얼마 전 어느 지방을 여행하며 잊고 지낸 어머니 손맛을 그곳에서 경험했다. 허름한 국밥집이었다. 식당 한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인 배추를 보며 ‘이곳이야말로 손님에게 진정한 음식 맛을 보게 하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에 주문한 국밥이 얼른 나오길 기다렸다.
그 식당은 김치를 꼭 직접 담아서 손님상에 내놓는단다. 곧이어 필자 앞에 뚝배기에 담긴 뜨끈한 국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란 좁쌀을 섞은 밥 한 공기, 그리고 금세 버무린 듯한 겉절이 한 접시가 나왔다. 그것을 보자 절로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서둘러 국물에 밥 한 공기를 말아서 게 눈 감추듯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 때 그 식당 김치 맛은 여느 음식점에선 맛볼 수 없는 어린 날 어머니께서 해준 맛 그대로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네 김치 종류는 각 지역 별로 그 수도 엄청나다.
‘강원특별자치도’는 무청김치, 더덕김치, 오징어섞박지, 해물김치. ‘충청도’는 열무김치, 시금치김치, 호박김치, 통무소박이. 경상도는 부추김치, 콩잎김치, 우엉김치, 무말랭이김치. ‘전라도’는 고들빼기김치, 돌산갓김치, 토하젓김치, 나주동치미, 해남갓김치.‘제주도’ 해물김치, 전복김치, 게쌈 김치, 귤물 김치 등이 있다. 이렇듯 각 지방마다 담가먹는 다양한 종류의 김치를 열거하노라니 현미가 부른 ‘총각 김치’라는 노래가 문득 생각난다.
‘ 달래볼까 울어볼까 하소연해도/ 아무리 당신이 목석이래도/뜨거운 나의 볼을 몰라주실까/ 아무리 당신이 바보라 해도/매큼한 총각김치 새큼한 그 맛’<하략>
다 아다 시피 이 노래는 1968년에 발표된 노래다. 그러나 ’총각김치‘라는 말 그 자체가 은유 화 된 에로시티즘의 표현이라 하여 부적절하다고 금지곡이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노래 가사 중엔 ‘매큼한 총각김치 새큼한 그 맛’ 이라는 가사에선 분명히 총각김치 맛을 그대로 표현 했잖은가. ‘총각김치’라는 낱말이 금지곡이 될 만큼 선정적이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가 잘 담그는 김치 중 한 가지가 총각김치다. 이밖에도 배추김치를 맛깔스럽게 잘 담근다는 가족들 평이 있다. 비법이라면 비법이 있다. 먼저 배추를 절일 소금을 천일염을 구입한다. 그리곤 물 몇 바가지를 소금 위에 끼얹어 씻어낸 후 햇볕에 말린다. 이렇게 하면 소금이 쓰지 않고 달다. 5년 묵힌 천일염으로 3시간 30여 분 배추를 절인 후 몇 번이고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다. 이것에 참조기, 생새우 및 배를 갈아 넣고 찹쌀죽도 쑤어 넣는다. 간은 새우젓으로 맞춘다. 그리고 무는 채치지 않고 듬성듬성 크게 썰어 김치 속에 켜켜이 넣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치 숙성 온도이다. ‘알싸하면서도 부드러운 산(酸)’맛을 내기 위해선 김치는 섭씨 4도에서 18-20일, 여름에는 13-14일 숙성 시켜야 김치가 제 맛을 낸다. 또 다른 비법이라면 사과 껍질을 김치 통 바닥에 깔아서 쉽사리 시어지는 것을 막는 일이다.
김치를 담글 때마다 깨닫는 삶의 진리도 있다. 무엇보다 인간관계 시 적당한 온도가 필요하다. 너무 가까우면 뜨거워서 데이고, 너무 멀리 있으면 냉랭함에 다가서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중용이 최고 적합한 인간관계 온도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