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한국불교의 거목으로 존경받는데 반해 잘못 알려진 행적이 많아 혼동을 주고 있다. 출가를 비롯 해골물 사건과 요석과의 만남에 이어 설총의 탄생 등 파계의 의미와 출신에 따르는 품계의 문제 등이다.
 
신라 특유의 골품제로 볼때 원효는 6두품이 아니라 5두품이었다. 일반적으로 통상 6두품이 정설로 굳어져 인용되고 있으나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원효는 아버지의 품계가 5두품인 11등급 내마로 출신에서 오는 신분상의 한계를 안고 있다. 때문에 서라벌이 아닌 변방을 떠돌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추구하는 불법이 자장의 불법과 맞지 않는 괴리감으로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진위를 파악하려면 단재가 지적했듯이 사람과 자료를 가려 이치적으로 따져보면 알 수 있다. 원효는 617년 태어났다.
일연은 유사에서 29세에 출가했다고 했지만 당고승전에는 관체지년이라고 해 15세쯤 출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효의 성장기에는 원광이 600년에 수나라에서 돌아와 세속오계를 설하고 서라벌에서 각종 법회를 주관하는 등 불교의 어른으로 대접받던 시절이다.
 
또 진골출신인 자장이 643년 귀국해 흥법의 기틀을 다지면서 왕즉불(王卽佛)로 대변되는 귀족중심의 불교가 자리잡는 시기였다. 자장은 승려들에게 철저한 계율중심의 생활을 강요하는 한편 왕실 중심의 불교를 지향해 원효가 추구하는 민중불교와는 대치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갈등에 대한 돌파구가 650년 당으로의 1차 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요동지역에서 첩자로 몰려 고구려에서 감금 당하는 등 유학에 실패하고 신라로 돌아왔지만 구도에 대한 열망이 깊을수록 갈등은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개혁과 올바른 불법의 전승을 위해서는 스스로 힘을 기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해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를 선언하게 된다.
 
'누가 나에게 자루없는 도끼를 주지 않겠는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원효의 몰가부를 두고 대다수가 파계를 자초한 구애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원효의 의도는 구애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불법의 방향과 사회개혁을 위한 힘 즉 도끼의 획득에 있었다.
 
귀족불교가 아닌 올바른 부처의 세상과 불교사상을 정립하기 위한 힘을 갈구한 것으로 봐야 한다. 태종 역시 신분이 낮은 원효이지만 구도에 대한 열망을 감안할 때 통치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원광과 자장세력의 단절을 위해서는 사상적인 대항마의 발굴이 절실했다고 볼 수 있다.
 
원효 역시 661년 깨달음 이후 분황사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면 불교계의 세대교체도 자연스레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662년 김유신이 전장에서 위난에 처하자 '송아지와 난새'의 해독을 원효에게 맡긴 것을 비롯 황룡사의 법회에서 지난날 100개의 서까래에도 끼지 못하더니 오늘에는 한개의 대들보가 되었다는 일화에서 위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의 힘이 일정부분 파계의 영향이라고 해도 일심 화쟁 무애사상은 불법에 대한 높은 공부와 구도에 대한 열정으로 이룬 결과임에는 이론이 없다. 그럼에도 신분의 변화는 찾을 수 없다.
 
아들인 설총 역시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성덕왕대인 719년 감산사아미타불조성기를 쓸 때의 벼슬이 11등급인 내마에 불과했다. 인맥상으로 보면 신문왕과는 처남 매형이며 신문왕의 동생인 성덕왕과도 가까운 관계다. 손자인 설중업 역시 10등급인 대나마로 5두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시 골품제의 엄격성으로 볼 때 아버지가 진골이라 해도 자식은 하위직에서 관직을 시작하고 전쟁에서 공을 세워야 품계가 오르는 실정에서 6두품을 비롯한 5두품과 4두품의 자식은 아비의 품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원효가 6두품이라는 근거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