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운문사하면 비구니 승가대학이자 '기도빨'이 좋다는 사리암을 떠올린다. 운문사는 최근에 원광의 세속오계를 부각시키면서 화랑정신의 발상지라고 홍보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의 창조다. 그러나 운문사 창건과 관련된 인물로 원광과 보양을 거론하지만 연대가 어긋나는 등 각종 이설들이 난무해 혼란을 주고 있다.당사자인 운문사 사적기의 기록과 승가교육기관 기록에도 차이가 있다. 운문사 사적기에는 신승이 557년부터 5갑사를 짓고 600년에 원광이 중창하고 말년에는 대작갑과 가슬갑사에 머물며 세속오계를 설했다며 화랑정신의 발원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반면에 운문사 승가교육기관에서는 560년 신승이 창건하고 608년 원광이 중창하면서 말년에 가슬갑사에 거주하면서 세속오계를 주었다고 돼 있다. 또 운문선사라는 사액도 사적기에는 937년으로 돼 있고 승가교육기관에서는 943년으로 적시하고 있다. 이처럼 운문사 자체의 기록도 다른 것이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도 오류를 범하기는 마찬가지다. 원광이 귀국후 3년간 대작갑사에 머물다 가슬갑사로 옮겨 세속오계를 주었다고 했지만 세속오계의 등장은 600~602년 사이다. 원광으로부터 세속오계를 받은 귀산과 추항이 602년 아막성전투에서 사망함으로 세속오계의 전수는 602년을 넘을 수 없다. 또 원광이 말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렀다는 운문사의 주장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608년 왕명으로 걸병표를 쓰는 등 귀국 후 당대의 고승으로 존경받은 점에서 말년에는 국찰인 황룡사에 거주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운문사의 사액 등 각종 기록의 오류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보양과 왕건의 관계를 이해하면 명확해 진다. 보양은 유학후 귀국해 밀양 봉성사에 거주한다. 이때 왕건은 운문사 근처 견성에 진을 친 도적들을 공격하다 난관에 빠지자 보양의 도움으로 격파하고 보답으로 봉성사에 쌀 50석을 희사하는 등 관계가 돈독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보양이 대작갑사터에 934년 작갑사를 짓자 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936년 토지 500결을 희사하고 다음해인 937년 운문선사로 사액을 한 것이다.일설에 나오는 943년 사액은 어디에서 근거하는지 알 수 없고 943년 5월에는 왕건이 승하한 시점임을 감안하면 사액을 이 시점으로 연결시키기에는 무리라 할 수 있다. 또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운문사는 원광과는 상관없다고 못박고 있다 이같은 단언은 자신이 1277년부터 4년간 운문사주지로 근무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원광의 성에 대해서도 당고승전에는 박씨라 했고 수이전에는 설씨요 화랑세기에는 김씨로 나온다. 출가한 곳도 중국으로의 유학시기도 기록마다 다르다. 당고승전은 567년 25세에 진나라로 유학을 왔고 589년에 수나라로 갔다가 600년에 귀국해 99세인 640년에 황룡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돼 있다. 반면 수이전의 기록은 안강 삼기산에서 수도하다 589년 유학해 11년을 공부하고 600년에 귀국해 84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 서쪽에 장사 지냈다고 했다. 이같은 혼동의 단초는 11세기 신라수이전을 쓴 김척명이 보양의 전기를 원광법사의 전기로 윤색한 것을 1215년 각훈이 해동고승전을 지으면서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잘못 전해진 탓이다. 수이전의 저자는 박인량 김척명 최치원 등으로 이견이 있지만 학계에서는 박인량이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일연은 보양이목 말미에 보양의 전기가 멸실된 것을 안따까워 하며 무망(없는 일을 있는 것 처럼 말해 남을 속이는 것)한 처사라며 김척명과 각훈을 나무라고 있다. 창건연대와 창건주를 비롯 사액과 유학시기 등의 오류가 어찌보면 하찮은 문제일지 모르지만 역사는 반듯하게 전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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