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볼일이 있어 오랜만에 서울 을지로를 다녀왔다. 한낮 폭염을 잠시 피해 볼 요량으로 낡은 건물 4층에 자리한 카페 ‘호텔 수선화’의 유명세를 믿고 카페를 찾았다.
  오래된 4층 건물엔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계단 난간 역시 검게 손때가 묻은 흔적과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어 지난 세월을 짐작케했다. ‘헉헉’대며 올라간 카페는 문을 여는 순간 대반전이 펼쳐졌다. 레트로를 표방한 인테리어는 ‘꼬릿’하기까지 했는데 힙한 MZ세대 손님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이곳이 을지로의 핫플로 알려진 것은 번듯한 건물 매무새도, 세련된 디자인도 아니었다. 단지 근현대 서울 시민의 흔적이 담긴 장소를 뉴트로로 변신시킨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근현대가 간직한 추억과 감성은 흔치 않고 MZ세대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듯했다.
  이렇듯 근현대유산이 수년 전부터 각광받기 시작했다. 급속한 사회 변화로 멸실·훼손되고 있는 유산을 보존활용하자는 움직임으로 그간 문화유산 보호 정책이 근대 이전에 치중된 점을 개선하고 1900년대 이후의 유산 보호에도 초점을 맞춘다는 발로다.
  개항기 전후부터 산업화를 거쳐 우리 생활공간에 현재까지 형성된 문화유산 중 가치가 인정돼 보존할 필요성이 있는 부동산 및 동산유산을 ‘근현대문화유산’으로 칭한다. 
 
국가유산청은 지난해 9월부터 ‘근현대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근현대문화유산법’)’을 시행하고 있는데 특히 주목할 것은 50년 미만의 현대문화유산까지 보호 범위를 확장하고 근현대문화유산지구를 지정해 등록문화유산을 보다 세심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1900년대의 역사와 문화, 생활을 보여주는 근현대 유산들이 소유자의 재산 가치를 위한 증·개축이나 철거로 무분별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10여 년 전 취재차 오스트리아 빈을 찾았을 때도 도심 곳곳의 페인트가 벗겨지고 낡아 보였지만 50년 이상이면 신중하게 결정하고 새롭게 칠을 한다고 현지 가이드가 설명했던 것이 떠오른다.
  2019년 경주시가 감포항 주변에 있는 근현대 시기에 형성된(50년 이상 경과) 근대가옥(일본인 가옥)을 비롯, 송대말 등대, 인공 수족관, 젓갈 창고, 근대 목욕탕 등 근대문화유산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 사업을 활성화한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전체적으로 조선소나 어판장 등 당시 감포항을 구체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없다. 송대말 등대나 인공 수족관 등 개별적인 유산은 가치가 높아 독자적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주시는 이후 감포의 개별적인 흔적이나 건축물에 대해서도 등록 지정문화재로의 수순을 밟지 않고 있어 당장 지정 수순부터 다시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리단길 대부분의 유무형 흥행 자산도 여기에 그 맥락이 닿아 있다. 또 경주 최부잣집 창고에서 발견된 수만 건의 문서들은 나눔과 상생의 정신을 방증하는 값진 정신의 보고(寶庫)들이다. 1907년 나랏빚을 갚기 위해 봉기된 국채보상운동의 경주지역 명단이 적힌 ‘경주국채보상운동 단연회’의 스토리, 최부잣집이 독립운동자금을 댔다는 구체적인 물증들이 다수 포함돼 있는 문서 등도 단연코 지정 문화재로 이름을 올려야 한다.
 
근현대문화유산은 ‘미래유산’과도 맥락을 함께 한다. 100년 후 보물을 미리 준비해 미래세대에게 전하고 모두가 누리는 문화유산으로 보존하자는 것이다. 미래유산은 문화유산으로 지정 혹은 등록되지 않은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으로 미래지향적 문화유산을 말한다.
 
경주의 미래유산이자 근현대유산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50년 이상된 노포들도 포함될텐데 경주에서 한 직종을 4~50년간 같은 장소에서 해 온 가게는 매우 드물다.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는 이들 대부분은 수작업에 의존하면서 시류와는 동떨어졌지만 힘든 경영을 버티면서 고집스럽게 일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경주 오릉 근처 ‘시민자전차 상회’, ‘남광 목공소’, 2대에 걸쳐 75년 세월을 같은 자리에서 일해 온 ‘건천 대장간’ 등의 노포들은 ‘점심을 굶고서라도, 잠을 자지 않더라도 주문 약속은 지켜 온 노포’들이다. 이른바 ‘백년가게’ 선정도 결은 비슷하다. 경주시는 시민의 이해와 참여를 바탕으로 시민 스스로가 경주의 문화와 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새로운 문화유산 보전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작고 사소한 개개인의 역사가 모여 마을과 국가의 문화자산이 되고 이윽고 20세기 우리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게 된다. 그런데 유독 경주시는 이 정책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 경주시 문화관광국 내 어디에도 미래유산이나 근현대유산과 관련한 부서명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도 먼저 '미래유산보존위원회'를 구성하고 시민 공모를 통해 경주 속 미래유산을 선정해야 할 것이다. 곳곳에 남겨진 산업유산과 생활유산 등은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산이며 그 문화유산을 가꾸고 활용하는 데 소유자, 시군, 역사문화연구원, 전문가 그룹과의 유기적인 협력이 핵심이다. 덧붙여 후속 행정적 지원이 뒷받침된다면 소외된 근현대문화유산은 미래 세대에 향유될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