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하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철강’을 먼저 떠올린다. 거대한 제철소 굴뚝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와 쇳물의 붉은 빛. 한 세대의 산업화를 이끈 풍경이다. 그러나 지금 포항은 철이 아닌 ‘생명’으로 도시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는 실험을 하고 있다.지난 6월, 정부는 포항과 안동을 국가 바이오 특화단지로 최종 지정했다. 명실상부하게 ‘K-바이오의 전진기지’로 공인받은 셈이다. 과거 철강 한우물만 파던 도시가, 이제는 유전자, 단백질, 백신 같은 단어로 세계와 경쟁하겠다는 선언이다.놀라운 건 이 변화가 정책이나 예산 몇 줄로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는 점이다. 포스텍, 한동대, R&D 기관들이 10년 넘게 닦아놓은 기초가 있었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와 극저온 전자현미경은 서울에도 없는 장비들이다. 연구자들은 이곳에서 세포 하나, 단백질 하나를 정밀하게 들여다보며 신약 후보 물질을 분석한다.이강덕 시장은 “포항은 바이오의 연구, 실증, 제조가 모두 가능한 몇 안 되는 도시”라고 말한다. ‘한국의 보스턴’을 꿈꾸는 발언이다. 정부도 긍정적이다. 지금까지 확보한 국비 예산만 1,200억 원을 넘어섰다.그러나 이 웅장한 그림에서 결정적으로 빠진 조각이 있다. 바로 의과대학이다.현재 포항엔 의대도 없고, 대학병원도 없다. 바이오 연구성과를 환자 진료에 연결할 수 있는 임상 파이프라인이 사실상 부재한 셈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약 후보 물질이 있어도, 그 효능을 사람에게 증명할 수 없다면 시장에선 무용지물이다.포항시와 시민들은 지난 2년간 의대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3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의대 설립을 촉구하는 서명에 참여했고, 시의회는 관련 조례를 통과시켰다. 포스텍도 의대 설립을 위한 TF를 꾸리고 교육부 및 보건복지부와 물밑 접촉을 이어가고 있다. 이 도시가 왜 의대를 필요로 하는지, 이해관계자 모두가 절실함을 공유하는 분위기다.물론 정치권도 이를 모를 리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당시 “경북권 의대 설립 검토”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아직 구체적 실행계획은 나오지 않았지만, 포항시는 이 약속을 근거로 경북도와 공동 보조를 맞추고 있다.전문가들은 포항의 이 같은 행보를 “지방소멸을 막기 위한 유일한 전략 중 하나”라고 말한다. 서울·수도권에 모든 자원과 인재가 쏠리는 구조 속에서, 지역이 자체 성장 동력을 가지려면 바이오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이 필수다.건국대 유태준 교수는 “포항은 기초연구, 실증, 기업 창업까지 가능한 드문 도시”라며 “여기에 의대까지 갖춰진다면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의 완전체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실제로 포항은 지금 기초과학자와 창업가, 정책가, 지자체가 모두 같은 비전을 공유하며 움직이는 보기 드문 도시다. 시는 바이오 스타트업에 연구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연구 장비를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투자 유치 설명회를 시 차원에서 주최하고, 인허가 절차도 전담 인력이 밀착 지원한다.또 포항은 AI와 빅데이터 기술을 결합한 ‘스마트 바이오 플랫폼’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융합한 신약개발은 기존보다 개발 속도는 빠르게, 실패 가능성은 줄이는 전략이다. 이 전략이 궤도에 오르면, 포항은 한국형 바이오 혁신 모델의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있다.지금의 포항은 한때 제철소 노동자들의 땀과 쇳물로 성장했던 도시다. 그 DNA에는 ‘기술로 도시를 바꾸는 힘’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철 대신 생명과 데이터를 들고, 또 한 번의 대전환을 준비하고 있다.남은 것은 정부의 결단이다. 이 실험을 ‘성공한 지역균형발전 모델’로 완성시킬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희망 고문으로 끝낼 것인가. 지금 이 도시의 심장은 이미 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