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명소 중 하나로 도심 관문인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손꼽곤 한다. 그러나 그 플라타너스 가로수 터널이 안겨준 청량함을 벗어나면 갑자기 종전의 기분이 희석되는 느낌을 받는다. 도심지 초입 길 양 옆에 즐비하게 늘어선 모텔들 때문이다. 
 
물론, 인근엔 고속버스 터미널이 자리해 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여장을 풀기 위해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로 남녀들의 밀회 장소로 이곳을 애용한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무튼 문인의 상상력은 천리를 뻗친다고 했던가. 도심지 입구부터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모텔 빌딩들이 왠지 눈에 거슬린다면 지나친 편견이려나.
평소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선 청춘 남녀가 어느 장소에서 밀어를 속삭였을까 궁금했다. 그럴 때마다 소설가 김동리의 소설 「윤사월(閏四月)」의 내용이 떠오른다. 
 
소설 ‘윤사월’의 서두를 살펴보면 누릇누릇 익어가는 보리밭 풍경이 펼쳐지는 대목이 있다. 이 소설 마지막 내용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남녀 정사가 이 보리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경이 묘사된다.
이렇듯 예전엔 남녀가 사람들 이목을 피해 은밀히 밀회를 즐길만한 장소로선 ‘보리밭’, ‘서낭당’, ‘물레방앗간’, ‘목화밭’등이 고작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런 열악한 환경도 남녀의 뜨거운 사랑 앞엔 별반 장애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보아 그 시절엔 청춘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일엔 현대인들보다 더 열정이 강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보리밭이면 어떻고 으스스한 서낭당이면 어떠하며, 음습하고 눅눅한 쥐가 드나드는 물레방앗간이면 또 어떠하랴 싶었나 보다.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는 장소 따윈 안중에 없이 물, 불을 안 가린 듯 하여 그 열정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만약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런 장소를 권한다면 기겁을 할 일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시골에서도 좀체 보리밭을 보기가 힘들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하여도 시골 들녘 곳곳이 보리밭이었다. 6월이 오면 보리가 누르스름하게 익어가곤 하였다. 이 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일렁이는 보리의 누런 잔물결은 어린 눈에도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도심지 회색빛 촌에 갇혀 사노라니 지난날 보리밭의 정겨운 풍경이 문득 그립다. 이 때 갑자기 가수 문정선이 부른 ‘보리밭’이라는 노래가 떠올라 입 속으로 나직이 불러본다.
‘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동네 야산에서 뻐꾸기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온다. 어린 날에도 오늘처럼 뻐꾸기가 구성지게 울 무렵이면 보리가 익어가기 시작한 걸로 기억한다. 어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외가엘 가면 큰 이모는 아직 채 익지 않은 알이 통통하게 밴 보리 이삭을 꺾어서 구워 주곤 했었다. 
 
입언저리가 새카맣도록 먹었던 구수한 보리 이삭 구이 맛은 아직도 입안에 감도는듯하다. 그러나 이젠 보리 이삭을 구워 주던 이모도 세상을 뜨고, 보리밭 정경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필자가 어렸을 적 만해도 보리밥은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오죽하면 그 당시 시골에선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릿고개라고 했을까? 그 시절 흰 쌀밥 한번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을 것이다. 쌀밥이 비만의 주범으로 대두 되는 현대엔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통곡물이 건강에 좋다고 하여 보리밥이 인기다. 이렇듯 폭염이 지속되는 여름철, 더위에 시달린 탓인지 입맛마저 까끌까끌하다. 이 때 꽁 보리밥에 구수한 된장찌개, 상추겉절이, 무생채, 새큼한 열무김치를 곁들여 고추장 넣고 비벼먹으면 잃었던 입맛이 되찾을 듯 하다.
이렇듯 현대에는 건강식으로 각광 받는 곡식이 보리이련만 그 재배 면적이 다른 작물에 떠밀려 줄어든 게 참으로 아쉽다. 어찌 들녘에서 좀체 찾아 볼 수 없는 곡식이 보리뿐이랴. 밀도 경작지를 쉽사리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필자 어렸을 때만 하여도 들에 나가면 보리, 밀밭이 지천이었건만 수익성이 높은 특용 작물 등의 재배가 늘어나면서 이 곡식들은 아예 자취를 감추다시피 하였다.
언젠가 남도 지방을 여행하다가 보리밭을 만나자, 너무 반갑고 그 광경에 마음을 빼앗겨서 밭머리에 한동안 머문 적이 있다. 보리밭은 유년 시절의 추억을 반추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해서 요즘 따라 그곳이 못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