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성덕대왕신종은 400여년간 하루도 쉼없이 매일 60회 이상 울었으나 지금은 박물관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봉덕사종 혹은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신종은 인신공양의 설화로 유명하다. 신라 35대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을 기리며 종 제작에 나서 아들인 혜공왕 7년 771년에 완성된다. 종제작 과정에 거듭된 실패로 급기야 어린아이를 시주받아 끓는 쇳물에 넣었더니 종이 완성되고 그 울림이 아이가 우는 것처럼 에밀레하면서 웅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밀레종이라는 말의 근원은 일제때인 1925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8월2일자 창작문예란에 렴근수가 쓴 어밀네 종 이라는 동화가 그 시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42년 친일 극작가 함세덕이 친일 목적극인 에밀네 종이라는 희곡을 쓰고 극장무대에 올려 일제의 비호아래 전국순회공연을 갖는 등 친일을 강조하기 위한 전설이 조작된다. 내용은 남녀의 삼각관계 사랑이야기에 에밀레종에 아이를 제물로 바쳐진 내용까지 친일에 가려진 얼룩진 모습을 담고 있다. 이후 1961년 조미령 최무룡 김진규의 에밀레종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고 1968년 리메이크한 김지미 남정임 신성일 출연의 에밀레종이란 영화가 히트되면서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 부르게 됐다. 신종은 높이 3.75미터로 무게는 18.9톤이며 주조 후 봉덕사에 걸렸으나 절이 수몰되는 바람에 백여년간 풀숲에 방치돼오다 1460년 영묘사로 옮겨졌다.이후 영묘사에서 군사의 징집을 알리는 용도로 쓰다가 1506년 남문 밖 봉황대 아래로 옮겨져 시간을 알리는 관종의 역할을 했다. (영묘사는 1515년 화재로 페허가 됐다) 종지기는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에 28번을 타종하고 해제를 알리는 파루에는 33번을 쳤다. 이외에도 성문을 여닫거나 군사의 징집을 알릴 때도 종은 울었다. 1915년 구 박물관으로 옮기기까지 400년을 쉼없이 울었다. 이후 197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중이다. 현재는 종보존을 위해 표면에 기름칠을 하고 타종 대신 음향장비로 소리를 대신하고 있다. 신종의 명문에는 우렁차고 아름다운 소리를 진리의 소리로 삼아 듣는 이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도록 하라는 원대한 염원이 새겨져 있다. 종소리는 소통의 상징이며 새로운 소리를 통해 시대의 아픔을 달래고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종은 울리지 않는다. 신라종의 특색은 용뉴인 종고리에 한마리의 용이 음통을 짊어지고 있어 중국이나 일본종과는 뚜렸이 구별된다. 용뉴의 음통은 곧 만파식적을 형상화한 것이며 용과 함께 새겨진 파도문양이 이를 대변한다. 신라종은 모두 7점으로 모두가 음통을 짊어지고 있는 형태다. 신라종으로 가장 오래된 종인 상원사동종 역시 용뉴에 음통을 가지고 있으며 높이 1.7미터로 제작시기는 성덕왕 24년 725년이다. 또 신라종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종은 무진사종을 비롯 연지사종 규흥사종 송산촌대사종으로 무진사종과 규흥사종은 대마도로 건너가 각각 팔번궁신사와 해신신사에 보관해 왔으나 명치혼란때 없어져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최고의 종은 일본에 있는 진(陳)나라 명문이 새겨진 575년에 주조된 범종이다. 신라는 기록상으로 삼국유사 염촉멸신조에 천가 6년 565년에 법당을 세우고 범종을 달았다라고 돼 있어 불교의 전래와 함께 종이 유입됐음을 알 수 있다. 또 신라최대의 종은 754년 경덕왕때 주조된 황룡사종으로 크기는 1장 3치이며 두께는 9치 무게는 49만7천5백81근에 달하는 대종이었다. 그러나 황룡사종은 숙종(1095-1105)때 6자8치 크기로 다시 종을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볼때 대종의 행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편 세계최대의 종은 1737년 울어 보지도 못하고 화재로 깨어진 러시아의 차르 대종으로 무게가 자그만치 202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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