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omy Sunday」는 비통한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세계 대중음악사에 죽음을 부르는 노래라는 전설을 남겼다. 
 
그러나 이 곡은 단지 비극적인 멜로디가 아니라, 상실을 넘어선 정서, 즉 슬픔이 문화를 관통할 때 어떤 얼굴을 가지는가를 보여주는 예술적 증거다. 그렇다면 이 곡에 들어 있는 애도, 절망에 대한 아름다움, 체념이 한국문학 ‘한’ 정서와 어떻게 접속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박완서와 한강 소설은 가장 적절한 응답을 들려준다.
박완서는 잃어버린 것들을 껴안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완서 소설은 결핍과 상실, 겉으로 들어 나지 않는 고통을 중심에 둔다. 특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같은 자전 소설에서는, 전쟁과 빈곤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 정서가 소리 내 울지 않는 슬픔으로 형상화된다.
박완서 인물들은 비극 앞에서 목 놓아 울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하고 참으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한’이 가진 문학 양상으로 드러난다. 가령, 어머니 죽음을 다룬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박완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상하리만큼 눈물이 나지 않았다”는 말로 시작한다. 울음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너무 깊어 더 이상 슬퍼할 수 없는 단계, 이는 박완서 문학에서 나타나는 한에 대한 정서이다.
「Gloomy Sunday」와 한이 만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박완서 정서는 「Gloomy Sunday」에서 피아노 음들이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Gloomy Sunday」 곡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끊임없이 가라앉는 것처럼, 박완서 문장은 격정이 아닌 내면에 있는 침묵을 길게 끌고 간다. 끊임없이 가라앉는 감정에서 두 작품은 정서적으로 나란히 이어진다.
한강 부재 시학에 대한 소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에서 말해주는 존재에 대한 상흔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 혹은 말해지지 않아 더 깊어져 가는 고통이 있다.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 학살을 목격한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침묵과 내면 붕괴는, 음악으로 표현하자면 완전히 낮은 음으로 구성된 장송곡에 가깝다.
특히 『소년이 온다』에서 주인공 동호가 친구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장면은, 죽은 자를 향한 끝없는 사랑과 죄책감이라는 점에서 「Gloomy Sunday」 서사와 같은 평행을 그린다. 이 소설 역시 “네가 죽었는데, 나는 살아 있다”는 죄의식이 삶을 잠식하며, 존재를 말할 수 없는 정적으로 침묵하게 만든다. 
 
“천사들도 널 데려오지 않는다”처럼, 한강 소설에서는 더 이상 누군가가 돌아올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슬픔은 육체 깊숙이 스며들고, 언어는 점점 어두운 침묵에 젖고 만다.
「Gloomy Sunday」와 만나는 지점으로 한강은 고통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하며, 그 침묵 자체를 미학화한다. 그녀 문장은 음악처럼 리듬을 가지며, 서사 구조보다는 정서 밀도에 방점을 찍는다. 「Gloomy Sunday」가 멜로디로 존재에 대한 모든 슬픔을 압축하듯, 한강은 한 문장에 생애를 응축시키는 방식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세 작가는 서로 다른 시대와 매체에 속해 있지만, “누군가 부재가 남긴 흔적”이라는 테마를 공유한다. 그들은 폭발이 아닌 지속, 격정이 아닌 침묵, 절규가 아닌 고요를 선택하며 슬픔에 대한 무게를 문학과 음악 언어로 전한다.
슬픔은 문화에 있어 가장 오래된 얼굴이며, 인간 감정 속에 있는 가장 오래된 얼굴이다. 슬픔을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문화마다 다르다. 「Gloomy Sunday」가 슬픔을 아름답게 파멸시키는 곡이라면, 박완서와 한강은 그 슬픔을 끌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쓴다.
죽음을 노래한 이 곡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 무거운 ‘삶에 대한 지속’이라는 감정을 한국문학에서 발견하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