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구전에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살아서는 충북 진천에서 생활하고 죽어서는 경기도 용인에 안장(安葬)되란 뜻으로 과거 진천에는 넓은 들과 비옥한 토지가 많아 먹을거리가 풍성한 고장이었고, 용인에는 산과 강이 어우러지는 풍수적 명당이 많아 묘지 쓰기에 적합한 장소가 많아 생겨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과는 달리 재미있는 야사가 몇 가지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 용인군 이동면 묘봉리에 어떤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농사일로 피곤한 남편은 점심을 먹고 논두렁에서 잠시 낮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천재지변으로 그만 죽게 되었다.    저승의 길목에서 염라대왕이 그의 신원을 확인하고는 “너는 아직 죽을 때가 멀었으니 다시 돌아가라”하여 집으로 돌아왔으나 집에서는 이미 장사를 치른 후라 시신과 접속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혼령은 접속할 시신을 찾느라 전국을 떠돌아다녔고, 충북 진천의 천석꾼 부잣집에서 아들의 초상에 장례를 치르지 않은 집이 있어 그 시신으로 접속하여 살아나게 되었다.    진천에서 다시 살아난 용인사람은 매일같이 “용인군 이동면 묘봉리에 내 처자식이 살고 있고 몇 살이다.”라는 말을 반복하기에 이를 이상히 여긴 어머니가 인마를 거느리고 용인 집으로 찾아갔더니 그곳에는 소복을 입은 여자가 혼자 울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 여자의 사연을 확인하고는 다시 태어난 자기 아들의 말과 너무나도 비슷하여 진천으로 데리고 왔다. 그 여자와는 얼굴은 달랐지만 몇 마디의 대화로 남편임을 확인하고 남편도 그 여자를 보고는 서로가 단번에 부부임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편은 진천부인과 용인부인을 같이 데리고 살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그는 진천 본부인에게 두 아들, 용인 부인에게 세 아들을 두고 노환으로 죽었는데 여기서 진천 아들과 용인 아들 사이에 아버지의 혼백을 서로 모시겠다고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진천 관아에 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진천군수가 “살아서는 어디서 살았느냐?”고 묻자 아들들은 한목소리로 “진천서 살았습니다.” 하니 진천군수는 “그래? 그럼 생거 진천했으니 사거 용인해라.” 하면서 살았을 때는 진천에서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용인지역의 대표 설화(야사)로 전해져 내려온 데에는 용인의 자연환경이 수려하고 풍수적으로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지역적 자부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과거 경기도 용인지역은 왜 명당이였을까? 그것은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에서 능역은 한양성 사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왕릉은 한양과 가까운 위치에 두어야 관리가 편리하고 선대왕을 자주 찾아뵐 수가 있으며 임금이 능행(陵行) 길에 변고가 발생하더라도 빠르게 환궁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용인은 왕릉 터 잡기의 영향권 밖으로 한양과 가까우면서도 한번 안장(安葬)되면 영원히 영면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산세가 아름다워 음택지로 각광 받는 장소가 많은 곳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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