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하면 불국사를 떠올릴 만큼 불국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의 하나다. 절마다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지만 불국사에 얽힌 설화들은 진위를 떠나 찬란한 우리문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불국사고금창기(1740년)에는 지증왕의 부인이자 법흥왕의 어머니인 연제부인의 보시로 법흥왕 15년 528년 화엄불국사를 창건하고 진흥왕 35년 574년에 중창했다고 돼 있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10년 751년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석굴암)를 지었다고 나온다. 학계에서는 불국토의 실현을 위한 신라문화의 집대성이라는 점에서 대성이 죽고난 후 신라가 국력을 쏟아부어 혜공왕 10년 774년 완공한 사찰로 보고 있다.불국사의 가장 큰 특징은 가람배치에 있다. 여느 사찰과 달리 화엄경전에 따라 법신 보신 화신불을 각각의 영역으로 배치해 불국토를 구현한 것이다.   첫째 법화경에 근거한 화신불인 석가의 사바세계로 백운교와 청운교를 지나 자하문을 통해 구현되는 대웅전 영역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함께하는 1금당 쌍탑으로 신라인의 이상인 불국정토를 상징한 것이다. 둘째는 무량수경을 근거로 연화교와 칠보교를 지나 안양문을 통해 극락세계를 구현한 서방정토의 영역이다. 보신불인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극락전으로 표현하고 있다. 셋째는 법화경에 근거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로 비로전이 자리하고 있다.이처럼 불국사는 단일 사찰이면서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을 제각각의 영역으로 구분한 3종 종합세트의 사찰이라는 점이다. 또 불국사와 함께 널리 알려진 석가탑과 다보탑은 다른 사찰의 탑과 달리 법화경의 장면을 탑으로 형상화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하고 있다. 석가탑은 석가가 부처가 되어 설법을 했다는 의미를 담아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이며 다보탑은 과거불인 다보불이 석가의 설법을 증명하는 다보여래상주증명탑으로 경전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다. 오늘날 석가탑의 정식 명칭은 불국사 3층 석탑이며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는 전설과 함께 무영탑으로 불려지고 있다. 불국사고금창기에는 당나라 장인이 석가탑을 만들던 중 여동생인 아사녀가 찾아 왔으나 만나지 못하고 탑이 완공되면 서쪽 10리쯤에 있는 연못에 탑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고 했지만 비치지 않아 무영탑이라 했다는 전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진 무영탑의 전설은 1938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현진건의 소설 무영탑에서 연유한다. 소설 무영탑은 백제 장인 아사달과 부인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얘기로 불국사 남쪽의 영지와 함께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탑은 알려진대로 무덤을 의미하는 인도의 스투파가 중국에서 솔탑파로 음역되면서 탑으로 굳어졌다. 탑은 불상이 없던 시절, 탑에다 진신사리를 모셨으나 사리의 한정으로 탑대신 불상이 조성되면서 탑문화는 쇠퇴한다. 이후 경전이나 상징물로 대체한 법신사리를 모시게 되면서 사찰마다 불상과 함께 다시 탑문화가 성횡했다. 탑 모양과 건축양식도 나라마다 달랐고 우리나라는 석가탑을 정형으로 삼아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은 3층을 기본으로 옥개석의 받침을 5개로 특정할 수 있으며 석가탑이 사랑받는 것은 깔끔한 단순미와 층간의 비례감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사찰마다 탑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찰마다 탑을 세우는 의미를 너무나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에 행여 구색갖추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불국사의 가람배치와 탑의 의미가 새삼 소중한 이유다 한편 불국사는 진입단계에서 부터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어 안타까움을 사고있다. 사찰의 위용을 드러내는 바로미터인 당간지주가 사찰의 입구에 세위짐을 감안하면 불국사는 복원당시부터 입구를 우측으로 돌려 원형을 잃고 있는 것이다. 또 자하문과 안양문을 통해 출입해야 함에도 보존상의 이유로 출입을 금하고 있어 불심(佛心)마저 반감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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