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대해서 항상 위화감이 있었어요. 부모님은 엄마, 아빠라는 단어는 한국말로 알려줬지만 일상의 보통 대화는 일본말로 가르쳐줬어요. 분노나 슬픔 등 감정을 표현할 때는 그러나 한국말로 내뱉고. 싸울 때 역시 한국말로. 근데, 옆 TV에서는 일본말이 흘러나오고….”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43)씨의 유년 시절은 혼돈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때는 말이 나오지 않아 실어증까지 앓았다. 학창시절 이지메로 자살 시도만 수 차례였다. 결국 고등학교 1학년 때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건 도서관에 틀어 박혀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유씨는 "재일동포로서 또는 재일동포 소설가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래서 직결적인 문제"라고 밝혔다. "언어를 다루는 소설가로서 인생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재일동포로서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씨는 13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해바라기의 관'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이 작품은 모국어인 한국어를 잃어버린 재일동포 청년과 한국인 여자유학생, 재일동포 소녀와 일본인 청년 등 남녀 두쌍의 진한 삶과 죽음의 드라마를 다룬다.
한마디로 "재일 한국인의 붕괴를 다룬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재일동포는 다리 위에 놓인 존재입니다. 다리의 양쪽 끝에 있는 사람들보다 언제나 바람을 가장 먼저 받게 되죠."
이 작품은 유씨가 21세 때 썼다. 당시 재일교포 극단인 신주쿠양산박의 김수진(57) 대표가 연출을 맡아 지금까지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주제"라며 "김 대표의 연출은 박력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평했다.
주로 죽음을 소재로 다루는 유씨는 "나의 작품은 장례식"이라고 표현했다. "일종의 고통과 아픔을 제대로 죽여서 배웅하고 이를 통해 다시 살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유씨는 희곡과 소설 작업을 오가고 있다. 24세에 기시다 구니오 희곡상, 28세에 일본 최고권위의 아쿠타가와 상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았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은 그러나 그녀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겼다. 일본 극우단체가 "건방지게 조선인이 아쿠타가와상을 탔다"며 위협을 가한 것이다. 사인회가 취소되고 유씨가 기자회견을 여는 등 소동이 빚어졌다. 유씨는 그러나 "재일한국인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계기다 됐다"며 달관했다.
그룹 '소녀시대'와 '카라' 등 일본 내 신한류 열풍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박찬욱(48), 봉준호(42) 등 한국 감독들의 영화에 관심이 더 크다. "이들이 나와 동세대여서인지 보고 느끼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2003년 동아 서울국제마라톤대회 참가 이후 8년만의 방한이다. "일본은 그 동안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한국은 밤에 불빛이 더욱 많아진 것 같다"고 놀라워했다.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유씨는 1년 전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2003년 마라톤에 참가한 것은 손기정과 함께 마라톤선수 생활을 했던 외할아버지 양임득을 소재로 한 소설 '8월의 저편'을 쓰기 위해서였다"며 "외할머니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은데 직접 한국말로 취재하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알렸다.
차기작은 '자살의 국가'다. "인터넷 자살 사이트 회원들의 자살을 지켜보는 열다섯살짜리 소녀가 주인공"이라며 "죽고 싶지는 않지만 죽음의 문턱에 다가가고 싶은 소녀의 심리를 그릴 것"이라고 귀띔했다.
지난해까지 항우울제를 복용했다는 유씨는 작품을 통해 느꼈던 이미지와 달리 밝고 털털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나 인터뷰를 할 때는 부러 더욱 밝게 꾸미는 편이에요. 집 앞까지 찾아온 10대 소녀 독자가 그러더라고요. 생각보다 밝아서 실망했다고.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