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은 늘 ‘농민’을 앞에 둔다. 농협중앙회장 인사말에도, 각종 사업 보고서에도, 명분의 첫 줄에는 농민이 있다. 하지만 최근 드러난 농협중앙회의 풍경은 그 단어가 얼마나 가볍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묻게 한다.농림축산식품부 특별감사 결과, 농협중앙회장은 해외 출장에서 숙박비 상한을 반복적으로 넘겼다. 1박 200만 원이 넘는 스위트룸도 있었다. 규정상 예외는 가능했지만, 예외를 설명하는 기록은 남지 않았다. 규정은 있었고, 책임은 보이지 않았다.보수 구조도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비상근인 중앙회장이 연 4억 원 가까운 보수를 받고, 상근 직책인 농민신문사 회장을 겸임하며 연 3억 원이 넘는 급여를 또 받는다. 퇴직금은 별도다. 숫자를 더하면 7억 원을 훌쩍 넘는다. 농협 내부에서는 ‘관행’이었을지 모르지만, 농민의 시선에서는 낯설다.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이런 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는가. 농협은 협동조합이다. 출자자는 농민이고, 존재 이유도 농민이다. 그렇다면 농협의 의사결정은 농민의 상식과 얼마나 닮아 있어야 하는가.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은 공개되지 않았다. 직상금은 수십억 원 규모로 집행됐지만, 지급 기준은 모호하다. 재량은 넓고, 설명은 적다. 이런 구조에서는 감시보다 침묵이 익숙해진다.농협은 민간기업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형적인 공공기관도 아니다. 그래서 더 엄격해야 한다. 공공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가진 조직일수록, 내부 규율은 외부 기준보다 높아야 한다.이번 논란은 특정 개인의 일탈로만 보기 어렵다. 회장의 겸직 관행, 보수 산정 방식, 출장비와 재량 예산 집행 구조까지 포함해 오래된 시스템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얼굴만 바뀐다.농민의 삶은 해마다 더 팍팍해지고 있다. 생산비는 오르고, 기후 리스크는 커지며, 소득 불안은 일상이 됐다. 이런 현실 속에서 농협 최고위층의 숫자들은 거리감을 더 키운다.농협이 다시 신뢰를 얻으려면, ‘합법’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농민 앞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농민을 위한다는 말은 쉽다. 그러나 농민의 눈높이에서 설명할 수 있을 때만, 그 말은 힘을 가진다. 지금 농협에 필요한 것은 해명이 아니라, 설득이다.그러나 농협의 문제는 숫자의 크기보다 설명의 부재에 있다. 왜 필요한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는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그 순간 공공성은 무너진다. 조직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때, 신뢰는 가장 먼저 이탈한다.농협은 농민의 협동조합이자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이다. 그렇기에 법적 책임 이전에 도덕적 책임이 따른다. 규정을 지켰는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농민이 이해할 수 있는가이다.이번 사안은 감사 결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보수 체계와 겸직 관행, 재량 예산 운용 전반을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돼야 한다. 투명성과 책임을 높이지 않는다면, 같은 논란은 다른 이름으로 반복될 뿐이다.농민은 더 이상 상징이 아니다. 농협의 모든 선택은 결국 농민의 이름으로 이뤄진다.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만드는 일, 지금 농협에 가장 절실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