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원전벨트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한때 중단됐던 영덕 천지원전 논의가 재점화되고, 경주는 소형모듈원자로(SMR)를 미래 먹거리로 내세우며 유치전에 나설 채비다. ‘탈원전’ 기조 아래 멈췄던 원전 시계가 AI 시대와 전력 수요 급증이라는 현실 앞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인공지능 산업, 데이터센터, 첨단 제조업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전력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 인프라가 됐다.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 확보가 곧 국가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며 원전은 다시 정책의 중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동해안 지자체들의 움직임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영덕은 상처가 남은 지역이다. 천지원전 백지화 이후 토지 매입 중단, 주민 갈등, 지역 침체가 겹치며 긴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일부 주민들은 기대와 상실을 동시에 경험했고, 지역사회는 찬반으로 갈라져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런 영덕이 다시 원전을 꺼내 든 배경에는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이라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인구는 줄고, 일자리는 없고, 젊은 사람은 떠난다.” 현장에서 들리는 주민들의 말은 단순한 찬성 논리가 아니라 생존에 가까운 호소다. ‘원전만이 답’이라는 현수막 문구는 과격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지역의 위기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경주는 접근 방식이 다소 다르다. 이미 다수의 원전을 운영해 온 도시로서, SMR을 기존 산업 구조 위에 얹는 확장 전략을 택했다. 월성원전 내 SMR 건립, 국가산업단지 조성, 연구·기업 유치까지 비교적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원전을 ‘새로 들여오는 시설’이 아닌 ‘고도화된 산업 자산’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경북도 역시 경주·울진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해안 원자력벨트를 전면에 내세우며 영덕과 손잡고 적극적인 유치 전략을 펼치겠다는 입장이다. 국내 가동 원전의 절반을 담당하는 지역으로서, 원전 정책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위치다.문제는 속도가 아니다. 과거 원전 정책의 가장 큰 한계는 ‘결정은 빠르고 설명은 부족했다’는 점이다. 유치 논의가 본격화될수록 안전성, 환경 영향, 지역 환원 방안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정보 공개가 뒤따르지 않으면 같은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특히 중단의 기억을 가진 영덕의 경우, 행정과 정치가 먼저 신뢰 회복에 나서야 한다. 주민 설명회와 공청회가 형식에 그쳐서는 안 되고, 사업이 중단될 경우에 대한 책임 구조까지도 사전에 논의돼야 한다. 원전 유치는 단기 성과가 아니라 수십 년을 책임지는 결정이기 때문이다.원전은 산업 정책이자 동시에 주민 삶의 문제다. 안전, 보상, 일자리, 지역 발전, 환경 보전이 하나의 패키지로 설계되지 않으면 ‘성장’은 숫자에만 머물 뿐 지역에 남지 않는다. 원전이 지역의 부담이 아니라 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그 구조부터 달라야 한다.AI 시대의 전력 수요 증가는 분명 현실이다. 그러나 그 해법이 원전이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충분히 투명해야 한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고, 유치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주민의 동의다.동해안이 다시 원전의 중심으로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쟁이 아니라 준비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같은 논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원전 시계는 다시 돌아가고 있다. 이제 그 시계를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가 동해안의 선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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