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과장된 소리로 요란할 때, 오래된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All for the Love of a Girl”. 마치 시간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 노래 멜로디는 마음속 깊은 곳, 오래 봉인해 두었던 첫사랑 기억을 정확히 건드렸다. 아무 예고도 없이.
“I'm a man who'd give his life/And the joys of this world/All for the love of a girl.” “나는 생명도, 이 세상 기쁨도 모두 바칠 수 있는 사람이에요. 한 소녀를 향한 사랑을 위해서라면.”
이 가사는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워서, 마치 감정이 차오르면 저절로 넘쳐흐르는 눈물처럼 느껴졌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계산하거나 조절하기 이전에, 이미 넘쳐버린 상태. 그래서 사랑은 그 자체로 시가 된다.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진심만으로도 충분한 언어.
문득 윤동주의 「서시」가 떠올랐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는 부끄럼 없는 삶을 꿈꾸었다. 시대 앞에서, 양심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노래 화자는 조금 다르다. 그는 소녀를 향한 헌신 속에서 부끄러움을 잊는다. 사랑은 때로 도덕을 넘어서는 힘이 된다. 옳고 그름을 잠시 내려놓게 만드는 감정. 그래서 사랑은 부끄럼을 덮는 망토가 되기도 한다. 필자가 이 노래를 들으며 어린 시절 첫사랑을 떠올린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여름밤 기억이 떠오른다. 마을 강가에서 반딧불을 쫓아다니던 밤. 물가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들이 깜박였다. 소녀는 웃으며 뛰어다녔다. 웃음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투명하다. 필자는 그녀를 위해 세상 모든 반딧불을 잡아주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만은 그랬다. 그때 필자는 노래 속 화자와 다르지 않았다. 세상 모든 기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마음. 사랑이란 그런 순간에 가장 순수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이별과 함께 온다. 마치 그림자처럼. 아무리 아름다운 순간도, 끝이라는 단어를 피해 갈 수는 없다. Fitzgerald,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데이지를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친다. 부와 시간, 심지어 정체성까지도. 그러나 결국 데이지는 그의 손을 떠난다.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개츠비는 꿈 속에 남는다. 노래 속 화자가 부르는 “Sad and broken hearted”라는 구절은, 데이지를 잃은 개츠비의 부서진 마음과 겹쳐진다. 사랑은 때로 우리를 완성 시키기보다, 산산이 부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부서짐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더 또렷하게 발견한다.
소녀를 잃은 화자는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양처럼 방황한다. 하지만 길을 잃었기에, 그는 사랑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묻는다. 상실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질문이다. 나는 왜 그토록 바치고 싶었는가. 나는 무엇을 사랑했는가. 그 질문 끝에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에 대한 방식으로 남는다.
김광섭 「저녁에」가 떠오른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다시 만남을 기약하지 못하기에, 이 가사는 더 깊게 울려온다. 이 노래 화자 또한 그리움 속에서 자신을 완성해 간다. 사랑은 성취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결핍과 부재 속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들으며, 필자는 사랑에 대한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바침이다. 김소월이 「진달래꽃」에서 꽃을 뿌리며 떠나는 이를 보내듯, 이 노래 화자는 소녀를 위해 삶을 바친다. 세상은 종종 말한다, 어리석은 선택일까? 라고,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헌신은 인간다움에 대한 가장 깊은 표정이다. 사랑은 우리를 길 잃은 양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어둠 속에서 별이 되어 길을 밝힌다.
눈 쌓인 오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내게 조용히 묻는다. “너는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겠느냐고.” 필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바람 소리는 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오래전 그 소녀 웃음소리처럼 낮고 희미하다. 세상은 여전히 극단으로 치닫고 있지만, 기억 하나가 아직 필자를 사람으로 붙들어 두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