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원도심 문화예술 창작지구 '꿈틀로'의 좁은 골목 안, 오래된 2층 건물의 크지 않은 공간. 간판조차 소박한 ‘다락방 미술관’에는 번잡한 인테리어 대신 오래된 기록과 이름들이 조용히 호명되고 있었다.
이 공간을 지키는 ‘박경숙 ART 연구소’ 박경숙 대표(62)의 시선은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예술가들과 예술’의 가치에 머문다. 그리고 그 시선은 결국, 지역 문화의 뿌리를 다시 길어 올리는 일로 이어지고 있다.43년. 박 대표가 화가이자 큐레이터로 살아온 시간이다. 1991년부터 2004년까지 포항 대백갤러리 개관과 운영, 2006년부터 2016년까지 포항시립미술관 개관 준비와 기획까지 학예사로서 약 25년의 현장 경험을 쌓은 그는 누구보다도 전시 시스템과 미술관 운영의 중심을 잘 아는 인물이다. 그러나 대형 갤러리와 공공 미술관에서 화려한 이력과 오랜 시간을 보낸 그가 선택한 길은 의외로 소박했다. 대형 전시도, 거창한 기획도 아닌, 이름 없이 흩어진 포항 지역 예술가와 문화의 흔적을 다시 불러내 ‘기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돈과 시스템만 있으면 거창한 전시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예술가는 사라지고 삶의 이야기도 함께 사라지더군요”그의 이런 각성은 지향점의 방향 전환의 계기였다. 현장에서 수많은 전시를 치르는 동안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온 것은 ‘조명받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지역 미술을 비롯한 문화 토양의 기반을 만들었지만 이름 없이 잊혀진 작가들, 기록되지 않은 인문·문화적인 순간들. 그는 그 공백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그가 치열한 현장 속에서 보낸 시간은 녹록지 않았다. 미술관 건립을 위한 설계 공모부터 행정 절차까지, 낯선 공무 시스템 안에서 홀로 감당해야 했던 부담은 컸다. “10년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 몸과 마음이 다 지쳤어요” 계약 종료 후 찾아온 공백의 시간은 휴식이자 질문이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다시 그를 움직이게 했다.
박 대표는 “사라진 인문학, 잊힌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야말로 해야 할 일”이라며 본격적인 아카이빙과 연구를 시작했다. 미술 전시를 넘어 지역의 근현대 문화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답이었고 그것은 인문학적 접근으로 더욱 풍성해졌다.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놓여 있던 시대와 사람, 그리고 이야기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이 같은 철학은 ‘다락방 미술관’과 ‘박경숙아트연구소’로 구체화됐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꿈틀로’ 일대의 낡은 2층 건물을 문화공간으로 바꾸며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다. 소규모 전시와 연구, 아카이브 축적과 강좌가 함께 이뤄지는 복합 공간. 크지는 않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가 머무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그의 작업은 더욱 또렷해진다. 그가 주목하는 대상은 근현대기 잊힌 인물들이다. 최초 아나운서, 초기 사진가, 비운의 화가 등 ‘유명한 사람 뒤에 가려졌을 뿐, 실제로는 더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당시 지역 문화의 기반을 닦았지만 이름이 남지 않은 이들을 하나씩 발굴하고 재조명해 지역 문화의 뿌리를 되찾는 일”에 주목한다. 최근에는 ‘포항의 이중섭’으로 불리는 김홍 화가를 재조명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1970년대 문화 불모지였던 포항에서 예술적 실천을 이어갔던 그의 삶 자체가 중요한 문화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판단에서다. 작품 수나 시장 평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시대적 맥락과 정신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내겠다는 시도로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연구소 형태로 운영되지만 대부분의 작업은 박 대표 혼자 감당해야 한다. 자료 조사부터 인터뷰, 기록과 전시 기획까지, 시간과 비용, 에너지가 끊임없이 투입되지만 ‘물질적 보상’은 거의 없는 편이다. 주변에서는 상업성과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획 전시로 돌아가라는 조언도 적지 않다. 그러나 박 대표의 선택은 분명하다. “이 일을 제가 하지 않으면 완전히 묻혀버릴 것 같아요” 그에게 문화는 기억을 이어가는 책임에 가까워 보였다.이 같은 열정은 이미 여러 성과로 이어졌다. 30년에 걸친 추적 끝에 재조명한 ‘청포도 다방’은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전쟁 이후 포항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공간이었지만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 장소는, 그의 연구를 통해 다시 의미를 되찾았고 문화재단 사업으로까지 확장됐다.또 1980년대 포항 청년 미술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since 1981, 그때 그림 그 사람’을 통해서는 지역 현대미술의 형성과정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냈다. 이 책은 사료적 가치와 함께 당시 청춘 작가들의 고민과 열정, 문화 환경을 생생하게 복원해냈다는 평가를 얻었다.
전시 기획에서도 그의 방향성은 일관된다. ‘어게인 1981년’전은 포항향토미술회와 포항청년작가회를 중심으로 한 1980년대 화단을 재조명하며 지역 미술사의 출발점을 다시 짚었다. 포항 근대 화단의 개척자 신대식, ‘소리 없는 선각자’로 포항 근대 사진가였던 박원식, 포항 근대 미술의 당산나무 배원복, 포항 근대 방송의 전설 아나운서 최규열 등 근현대 예술가들을 조명한 전시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잊혀진 이름들을 불러내고 그 의미를 현재로 연결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박 대표의 이러한 행보는 개인 작업을 넘어 지역 문화의 토대를 복원하는 일로 이어진다. 박 대표는 포항 미술사를 “표면적으로는 빈약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풍부한 문화 인적 자원을 가진 토양”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것이 제대로 정리되고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 더 큰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포항 근현대 미술 100년사를 정리하는 책이다. 수많은 인물과 사건, 사라질 뻔한 이야기들을 엮어 지역 문화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이다.“문화는 결국 사람과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처럼, 다락방 미술관의 불빛은 화려하지 않다. 박경숙 대표는 오늘도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턱 낮은 담박한 공간에서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