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과거는 찬란하다. 그러나 도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의 영광만으로는 부족하다. 천년고도 경주가 다가오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그 물음에 그림과 설계, 상상력으로 답하려는 이색 전시가 열린다.건축가이자 도시기획자, 그리고 화가로 활동해온 고만석 작가가 경주문화관 1918(구 경주역)에서 28일부터 5월 3일까지 개인전 ‘미래 천년을 그리다’를 열고 예술과 도시비전을 접목한 새로운 형식의 전시에 나선다.전시는 특히, 경주의 미래 청사진을 시민과 함께 나누는 제안형 참여 전시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경주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형식의 이번 전시는 고 작가의 회화 작품과 함께 도시계획 아이디어, 미래형 관광 콘텐츠, 시니어타운 모델, AI를 활용한 도시 이미지 구상까지 함께 선보인다.이는 예술 전시장이자 도시정책 포럼으로도 읽히는 대목으로, 개인전이면서도 공공 프로젝트의 성격을 띨 것으로도 보인다.지난 24일, 작업의 산실인 경주시 진현동에서 고만석 작가를 만났다. 봇물이 터지듯, 경주시 발전과 비전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제안이 쏟아졌다. 그는 “경주의 과거 천년은 이미 위대하다. 이제는 미래 천년을 준비해야 할 때”라고 연신 강조했다.고 작가의 이력은 독특하다. 젊은 시절부터 미술을 전공하고 건축·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1990년대 국내 컴퓨터그래픽(CG) 도입기 현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이후 건축설계, 공간디자인, 조경, 도시개발계획 시행 분야를 넘나들며 30여 년 실무 경험을 쌓았다. 전국 관광단지와 호텔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해외 선진 시설을 직접 둘러보며 도시개발 감각도 익혔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도시개발 사업 등 국제 프로젝트 경험도 가지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경력도 만만치 않다. 영화계와 인연을 맺으며 영화 '초록물고기', '체인지' 등의 미술 관련 작업에도 참여했다. 공간을 읽고 장면을 구성하는 능력은 이후 그의 회화 작업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는 “건축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도 구도와 구조, 원근과 공간감이 스며든다”고 설명했다.실제로 그의 작품은 일반적인 풍경화나 구상화와는 결이 다르다. 화면 속에는 도시의 구조감과 회화적 감성이 동시에 흐른다. 수평과 수직의 긴장감, 투시의 깊이, 공간의 분할 같은 건축적 요소가 깔리면서도 색채는 따뜻하고 자유롭다. 그는 아크릴, 오일파스텔, 수채화지, 각종 혼합재료를 넘나들며 독특한 질감을 만든다. 건축 재료를 응용한 마티에르 표현도 그의 회화 특징 중 하나다.그는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차갑지 않아야 한다. 사랑이 담기고 따뜻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빠르게 마르는 아크릴의 속도감, 파스텔의 부드러움, 캔버스와 종이의 질감을 자유롭게 섞어 자신만의 화면을 만든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계획적이면서도 감성적이고 구조적이면서도 서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가지 결의 전시를 동시에 선보인다. 먼저 경주와 고향의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소개된다. 첨성대, 불국사, 고도(古都)의 풍경, 밤빛이 내려앉은 고향의 인상 등을 그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도시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새롭게 읽어낸 화면들을 선보인다. 도시가 가진 깊이 위에 현대적 감각을 덧입힌 셈이다.전시의 또 다른 축은 ‘미래 경주 제안’에 대한 내용으로, 과거 풍부한 경력을 바탕으로 건축, 조경 디자인, 도시 계획, 교통, 관광단지 개발 등을 조감도 및 투시도 등을 통해 펼쳐 보인다.
고 작가는 먼저 경주가 가진 역사문화 자산과 관광 인프라, 자연환경을 결합하면 전국 최고 수준의 시니어타운 도시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은퇴 세대가 머물며 생활하고 자녀와 손주 세대는 주말마다 찾아와 즐길 수 있는 생산과 소비, 문화활동까지 함께 누릴수 있는 구조를 경주가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또 한옥과 어우러진 디자인의 버스정류장에 태양광 패널과 센서 조명을 설치해 친환경·스마트 시설로 개선하자는 내용도 선보인다. 첨성대·황리단길·천마총 일대는 일정 기간 차량 통행을 제한해 보행 중심 거리로 조성할 필요성도 제안했다.이어, 도시 발전의 핵심 과제로 주차 문제 해결을 꼽았다. 이를 위해 기존 평면 주차장을 입체화하고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경주다운 디자인’과 조경을 접목한 주차 공간 조성이 필요하다고 제시한다. 이외에도 구 경주역사, 황룡사 9층목탑 등의 활용 방안 등도 함께 제시된다. 고 작가는 또 경주가 ‘예술가가 거리에서 작업하는 도시’가 되길 꿈꾼다. 파리 몽마르트르처럼 화가들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시민과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예술을 만나는 풍경이다. 이를 위해 전시와 함께 시민 사생 모임, 생활미술 동호회 조직 계획도 내놓았다. 초보자도 누구나 참여해 불국사, 첨성대, 황리단길 등 경주 곳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문화운동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펼쳐 보인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경주가 외형적 개발만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 인적 자원을 활용하는 도시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역에는 숨어 있는 전문가와 고수들이 많다. 그들의 경험을 도시를 위해 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정 역시 다양한 민간 전문가 자문 시스템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고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개인의 단순한 작업 발표를 넘어선다. 경주에 정착해 살아오며 마음속에 쌓아둔 제안들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로, 경주를 사랑하는 한 시민이 붓과 설계도로 구현한 경주의 미래 제안서이자 예술가의 상상력이 담긴 보고서이기도 하다.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경주가 과거 천년의 도시를 넘어 미래 천년의 도시가 되는 데 작은 밑거름이 되고 싶다”라면서 특히 경주시 관련 부서 직원들과 조경학, 관광학, 건축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많은 관람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