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죠. 황룡사 등 과거의 건물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그 자리에 존재했던 '기억의 터'를 보존하고 나머지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맡겨야 합니다"건축계 거장 승효상 건축가가 경주에서 던진 이 말은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경주가 앞으로 어떤 도시로 기억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계기가 됐다.    그는 황룡사를 비롯한 역사 공간을 단순히 복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시간의 흔적과 기억을 간직한 '기억의 터'로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개발과 복원 중심의 문화유산 정책을 넘어 역사와 상상력이 공존하는 인문학적 도시 경주의 미래를 제안했다.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인문도시사업단(단장 홍은숙 교수)은 지난 23일, 승효상 건축가를 초청해 경주학 콜로키움을 열었다. 이날 특강에는 시민과 학생, 교수 등 120여 명이 참석해 경주의 공간과 문화유산, 도시의 미래를 함께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특히 이날 행사에는 한국화의 대가인 소산 박대성 화백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은 경주 솔거미술관 프로젝트를 통해 맺어진 인연을 다시 이어가며 예술과 건축이 공유하는 철학을 나눠 문화예술인과 시민의  공감대를 형성했다.승효상 건축가는 이날 자신의 건축 철학의 핵심 개념인 '지문(地文·Landscript)'을 중심으로 강연을 이어갔다. 그는 지문을 단순한 땅의 형상이 아니라 오랜 세월 축적된 자연의 기운과 사람들의 삶, 기억, 감정, 관계가 켜켜이 쌓여 형성된 '터무늬'라고 설명했다.이어 "하늘에는 천문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문이 있듯 땅에는 지문이 존재한다"며 "건축가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읽고 번역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건축은 공간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장소가 품고 있는 시간을 해석하는 인문학이라는 해석이었다.그는 이러한 철학이 실제 건축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도 소개했다. 제주 '애월한거'를 사례로 들며, 건물을 짓기 위해 기존의 지형과 오래된 소나무를 없애는 대신 자연을 그대로 살려 설계함으로써 땅이 간직한 기억과 풍경을 보존했다고 설명했다. 건축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담긴 대표적인 사례였다.이어진 지정토론에서는 경주의 미래 도시 비전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승효상 건축가는 경주가 지닌 가장 큰 자산은 불교문화가 축적해 온 '영성'이라며,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사찰과 탑, 유적이 만들어내는 정신적 풍경을 도시의 정체성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경주가 단순한 역사관광 도시를 넘어 '영성의 도시'로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유산 복원을 둘러싼 질의응답에서는 열띤 논의가 펼쳐졌다. 동국대 한정호 교수는 '충분한 고증 없이 추진되는 복원이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고, 이에 승효상 건축가는 근거 없는 복원은 과거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허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지적했다.그는 "현대의 재료와 기술로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건축을 박제하는 방식의 복원은 오히려 역사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라며 "황룡사가 존재했던 장소의 기억을 보존하고, 그 빈 공간을 시민들의 상상력으로 채우게 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보존 방식"이라고 역설해 공감을 얻었다.이번 콜로키움은 건축을 통해 경주의 문화유산과 도시의 미래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한 자리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복원과 보존, 개발과 기억 사이에서 경주가 나아갈 방향을 시민들과 함께 고민한 공론의 장이 된 것이다. 홍은숙 동국대 WISE캠퍼스 인문도시사업단장은 "이번 특강은 경주가 품고 있는 인문 자산의 가치를 시민들과 함께 다시 발견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앞으로도 지역의 유·무형 문화자산을 발굴하고 시민들과 공유하는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장소가 간직한 시간과 기억의 가치를 읽어야 한다는 승효상의 메시지는 고도 경주가 어떤 도시로 기억되어야 하는지를 되물으며, 경주가 가진 인문학적 자산의 미래를 밝히는 뜻깊은 이정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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