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자락 오래된 마을에서 자연과 시간을 벗 삼아 살아가는 손영 화가(63)가 최근 3년간의 작품세계를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았다.
 
삶의 상처를 자연으로 치유하며 기억의 흔적을 생명력 있는 화면으로 빚어온 그의 개인전 ‘지난 여름(The Last Summer)’이 오는 8월 30일까지 복합문화공간 경주 프레지던트 신라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자연과 인간, 삶의 기억, 문학적 상상력이 어우러진 작품들이 부드럽지만 강렬한 작가의 이미지처럼 조용한 위로를 건넨다. 
 
지난 3일 경주 진현동 화실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잔잔한 미소와 사색적인 눈빛으로 작품 세계와 삶, 그리고 이번 전시 이야기를 풀어냈다. 화려한 수식보다 담담한 언어를 선택하는 그에게선 오랜 시간 예술을 벗 삼아온 작가 특유의 깊이와 진정성이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이번 전시는 2023년 ‘DEAR YOU’, 2024년 ‘아직은 여름’, 2025년 ‘여백의 시간’ 등의 고백적 작업 가운데 선별한 전시다. 올해로 19번째 개인전을 맞이하는 손 화가에게도 이전 전시작을 다시 모아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이번 전시는 작가가 걸어온 시간과 예술세계를 되짚는 하나의 회고이자 앞으로 나아갈 작품세계를 가늠하는 이정표가 될 것으로도 보인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큰 화두는 ‘시간’이다. 정작 작가는 최근에야 자신의 모든 작업이 결국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화면 속 자연 안에는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이 스며 있다.
 
최근 작업으로 올수록 색채는 절제되고 선은 단순해졌으며 화려한 표현보다 여백과 침묵이 화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여백의 시간’ 연작은 이러한 변화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는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다. 우리가 보고 만지는 것은 존재의 절반일 뿐이며 보이지 않는 마음의 차원이 또 다른 절반을 이룬다”고 했다.
 
손영 화가가 토함산 불국사 자락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이유 역시 ‘시간성'으로, 남편의 고향이었던 경주를 작가 스스로 선택했다. 신라 천년의 역사와 오래된 자연 부락, 불국사 종소리와 골목길 등 이곳에 축적된 시간의 깊이에 이끌렸다고 한다.
 
“오래되고 축적된 것들을 좋아합니다. 불국사는 오래된 시간과 사람들이 남긴 정념이 살아 있는 공간입니다” 그는 경주에 정착한 이후 작품세계도 크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자신의 감정을 화면에 강하게 드러내는 표현주의적 성향이 짙었다면, 지금은 화면 속에 숨어 있는 시간과 기억, 흔적을 발견하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자연을 그리는 것으로부터 시간과 감정을 그리며 나아가 ‘마음을 심는 것’이라 표현한다. 그러면서 “복제품에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생명력을 그리고 싶었다. 기술과 표현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그림”이라고 강조했다.
 
“선 하나에도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그린 선보다 살아 움직이는, 감정을 품은 선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의 화면에는 수백 번의 붓질 끝에 남겨진 흔적과 연필선, 덧칠과 긁어낸 자국들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이러한 생각은 인공지능 폭주 시대에도 더욱 선명해진다. 아무리 정교한 기술이라도 생명력이 없는 그림은 죽은 그림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손 화가의 작품에는 남편을 향한 그리움도 깊이 배어 있다. ‘DEAR YOU’ 시리즈는 남편을 떠나보낸 뒤 슬픔을 견디며 그린 작품들이다. 그는 “삶과 죽음을 가까이 경험한 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지금의 그림은 그 이후 얻은 평화와 감사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손 화가는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세상에 잘못된 그림은 없다’는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지우지 않는다. 실패조차 작품 안으로 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버리는 공부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익힌 테크닉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좋은 그림이 나온다”는 말은 이를 방증한다. 
 
지금까지 전업작가로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상품성보다 예술세계를 선택한 그의 전업작가 인생도 이러한 철학과 맞닿아 있다. 물감 살 돈이 없어 캔버스를 덧칠해 다시 사용하던 시절에도, ‘예쁜’ 그림을 그리면 잘 팔릴 것이라는 권유를 받을 때도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유명한 화가보다 그림에 진심인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단언하는 그는 그림만큼 글도 오래 써왔다. 그림뿐 아니라 시집 ‘나의 시월, 나의 경주’와 ‘여백의 시간’, 화집 ‘디어유’를 펴내며 문학으로도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장해 온 손 작가는 ‘글도 그림도 결국 진심으로 하는 일’이라고 했다.
 
손영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예술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철학을 꾸준히 표현해 왔다. 오래된 시간도, 풀꽃도, 여백도, 남편에 대한 그리움도 결국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의 그림을 오래 바라볼수록 깊어지는 것은 화면 속 스며 있는 삶의 상처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리고 ‘사랑’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