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햇볕이 유난히 뜨거웠던 올해 여름. 경주 황리단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조금 느려졌지만 한옥 책방 ‘무제(대표 이운식)’의 문을 여닫는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책을 고르는 사람, 책장을 천천히 넘기는 사람, 한쪽에서 조용히 필사하는 사람, 잠시 더위를 피해 공간을 둘러보는 사람까지..., 몇몇 업종에 편중돼있던 황리단길 상가에 문화의 향기를 불어넣고 있는 책방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이어졌다. 올해 2월 5일 책방 문을 열었음에도, SNS를 달굴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책방 ‘무제’의 이운식 대표(43)는 책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차분한 표정 사이로 웃음이 번지고 책 한 권을 고르는 이야기에 오래 머물렀다. 온화하고 조용한 인상에 가까운 그가 책 이야기를 꺼내자 눈빛이 한층 밝아지고 말에도 힘이 실렸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서 있는 모습에서는 이곳 외에도 여러 사업장을 운영하는 사업가라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공간을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싶어 하는 영락없는 ‘책방지기’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경주에 오면 꼭 가봐야 하는 그런 서점이 되는 게 목표예요” 경주 황리단길 한옥 책방 ‘무제’를 운영하는 이운식 대표의 꿈은 의외로 단순하다. 돈을 많이 버는 큰 사업장을 만드는 것보다 경주를 찾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러보고 싶은 책방,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지역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이 대표는 1982년 경주 출생으로 서울 금융회사에서 7~8년 근무하는 등 바삐 지내다가, 고향 경주로 돌아온 뒤 전공이나 경력과는 거리가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나씩 사업으로 구현했다.2019년 문을 연 ‘월성과자점’이 그 시작이었다. 디저트와 빵을 좋아했던 그는 경주 대릉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과 전통 한옥의 공간미를 살린 디저트 가게를 열었다. 이곳은 경주시 건축상을 받을 정도로 외관과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디저트 카페다.    이후 경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신라복 중심의 한복 대여점 ‘입고 놀자’를 열었고 젤라또와 과일 모찌를 판매하는 '달방앗간'도 운영하고 있다. '달방앗간'에서는 경주에서 생산되는 딸기를 계절에 맞춰 지역 농가에서 직접 받아 사용한다. 이들 가게들은 황리단길을 찾는 관광객에게는 눈에 띄는 공간들로 이미 성업 중이다. 여름철에도 디저트 가게와 과일 모찌 가게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한복 대여점에는 학생 단체와 외국인 관광객 등 꾸준히 찾는 고객들이 많다. 단지, 가게 숫자를 늘린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공간에 ‘경주다움’을 넣어온 결과다. 월성과자점에서는 경주의 풍경과 디저트를 함께 즐기게 하고 한복 대여점에서는 다른 지역의 궁중한복이나 일반 한복과 달리 경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신라복을 선보인다. “경주에서만 입을 수 있는 한복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경주 문화를 알리고 싶은 구상이 들어간 거죠”  이는 경주를 사랑하는 사업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사람을 찾아가고 배우고, 공간을 만들고 상품으로 구현한다. 신라복을 위해 서울 광장시장의 한복 디자인 전문가를 직접 찾아가 제작을 부탁했고 책방을 만들 때도 책장과 선반의 크기와 디자인, 위치, 칠까지 손수 다 챙겼다고 한다. 네 곳의 사업장을 운영하면서도 이 대표가 가장 애정을 보이는 곳은 단연 책방이다. 책방 ‘무제’는 어린 시절 자란 집을 고쳐 만든 공간이다. 1970년 지어진 황남동의 오래된 한옥 골격과 서까래를 살리고 그 안에 책을 채웠다. 책장과 선반 하나하나에도 그의 손길이 들어갔다. 완벽하게 새것처럼 다듬기보다는 오래된 집이 가진 결을 되살려 놓았다.그래서인지 공간에는 묘한 편안함이 있다. 빈티지한 소품과 책, 그림과 식물이 어우러진 실내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황리단길의 북적임과 잠시 거리를 둘 수 있다. 이 대표가 책방을 이야기할 때 유독 표정이 밝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침에 책방에 와서 책들을 정리하고 책에 대한 소개글을 직접 쓸때마다 행복해요” 그에게 책방은 수익을 위한 또 하나의 사업장이 아니라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꿈을 현실로 옮겨놓은 공간이다.책을 고르는 기준 역시 ‘잘 팔리는 책’에만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지금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일지 생각한다. 경주와 관련된 책을 비롯, 독립출판물, 고전 등도 꾸준히 늘리고 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는 주변에 묻고 다시 찾아보며 책방의 고유한 ‘색’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그 색깔은 이제 책방 밖으로도 번지고 있다. 지난달 17일 첫 북콘서트를 통해 책과 관련된 문화행사의 문을 활짝 열었다. 앞으로도 작가와의 만남, 낭독, 독서모임(‘아무튼 독서클럽’ 운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어갈 계획이다. 한옥의 높은 천장 아래 마당까지 활용하면 어린이 책 행사나 출판사 팝업 등도 가능해 보였다. “책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고 생각해요” 그가 그리고 있는 책방 '무제’의 미래는 런던이나 파리 같은 세계적인 도시에서 여행자들이 일부러 찾아가는 서점에 가깝다. 그는 “경주에 왔을 때 관광지만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책방에 들러 경주의 역사와 현재를 책으로 만나고 한 권의 책을 품고 돌아가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특히 그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지역민에게도 책을 가까이 전하고 싶어 한다. 대구와 부산은 물론 인근 도시에서 독서모임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책방이 좋아 여러번 찾는 사람들을 볼때면 책방 운영을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커진다고 한다.이 대표가 4곳의 가게를 운영하는 데 있어, 코로나19로 카페 운영이 어려웠던 시기도 있었고 경험해보지 않은 일을 처음부터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러나 그는 “힘들어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에 거기서 얻는 만족감이 훨씬 큰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또 다른 업종에 도전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성공을 위한 야심’과는 조금 다른 답을 내놓았다. “우리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아서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이 짧은 인생에서 해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당장은 새로운 가게보다 책방 ‘무제’에 힘을 쏟을 생각이란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작가, 출판 관계자, 지역의 독서인들이 함께 공간을 만들어가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그가 바라는 최종 목적지는 분명하다. “책방 ‘무제’가 아직 시작 단계이지만 경주를 찾으면 꼭 방문하는 서점이 되는 것”이다. 이미 황리단길 한복판에서 그 가능성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운식 대표가 만든 네 개의 공간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경주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들고 그 경험 속에 자신의 취향과 경주의 문화를 함께 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책방 ‘무제’가 있다.어쩌면 그가 진짜 만들고 싶은 것은 방문객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책방 무제’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유도 책을 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잠시 쉬고, 책 냄새를 맡고, 어쩌면 자신에게 필요한 한 문장을 만나기 위해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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