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강국론은 정치 강령이 아니라 신화다. 신화는 원래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언어였다. 왜 태양이 뜨고 지는지, 왜 인간은 죽는지를 이야기 했던 고대인 방식처럼, 문화강국론은 식민과 분단, 독재와 전쟁이라는 설명 불가능한 폭력을 하나의 상징으로 이겨내려 한 시도였다. 상징이 가리키는 곳은 무력이 아니라 아름다움이었다.
 
한 사회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식은 신화 재구성이다.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폐허 위에서 오디세우스 귀향 서사를 지어냈듯, 로마인들이 패망한 트로이 후예 아이네이아스를 제국 시조로 다시 세웠듯, 상처는 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야 다음 세대로 전해질 수 있다. 3.1 운동 함성과 억압받았던 기독교, 그리고 근대화 두 갈래 길 -군국주의 길과 자유와 평등의 길-로 갈라졌던 역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 구조를 갖는다. 시련, 배신, 각성, 그리고 귀환이라는 고전 서사시 원형처럼.
융 인지 이론을 빌리면 이 서사는 집단무의식 원형과 맞닿아 있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상징으로 되돌아온다. 한류라는 현상은 어쩌면 오랫동안 억눌렸던 집단 에너지가 춤과 노래와 영상으로 승화된 결과일지 모른다. 프로이트가 개인 꿈을 억압된 욕망의 위장된 충족이라 불렀다면, 韓 민족 대중문화 역시 집단이 꾸는 꿈이라 할 수 있다. 꿈속에서 식민지 설움과 전쟁 폐허, 독재 억압은 화려한 무대 조명으로, 상실을 서정으로 바꾼 결과이다.
전통 서정이 개인 감정을 자연물에 투사하는 데 머물렀다면, 신서정은 개인 감정과 역사적 상처, 그리고 공동체 기억을 하나의 정서적 층위에서 통합한다. 은유가 환유로 확장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사람 슬픔이 민족 슬픔으로, 다시 인류 보편 그리움으로 번져가는 확장 원리가 없었다면 한류는 국경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확장은 오래된 전설과 민담에 들어있다. 마고할미가 산과 강을 빚었다는 이야기, 삼신할머니가 생명을 점지한다는 믿음, 웅녀가 사람이 되어 시조를 낳았다는 건국신화 -이 모든 한국 모성 신화는 공통적으로 창조와 인내, 그리고 변신을 이야기한다. 곰이 쑥과 마늘을 먹으며 어둠 속에서 백 일을 견디는 장면은 문화강국론이 요구하는 인내와 승화 원형 그 자체다. 고통을 통과해야 사람이 되고, 사람이 되어야 시조가 된다. 문화 역시 고난을 통과해야 세계를 향해 말을 걸 자격을 얻는 것처럼.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에서 봄을 데리고 돌아오듯, 오르페우스가 저승 문턱까지 내려가 음악으로 세상을 감동시키듯, 문화라는 힘은 언제나 어둠을 통과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동서양이 닮아 있다는 사실은 인문사회학이 말하는 문화 보편성 증거이면서, 동시에 왜 한류가 특정 문화권을 넘어 낯선 이국 관객에게도 즉각적으로 가닿는지를 설명해 준다. 원형은 번역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판타지는 현실이 감당하지 못하는 진실을 우회로로 전달하는 오래된 인문학적 장치였다. 어린 시절 들었던 옛이야기 속 괴물과 요정은 성장한 뒤 드라마와 영화 속 새로운 얼굴로 되돌아온다. 상징은 그렇게 시대가 요구하는 옷을 갈아입으며 살아남아 예술이 된다.
  억압된 역사, 기독교, 갈라진 근대화 두 길, 이 모든 무거운 사실들을 예술은 무겁게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노래로, 이야기로, 색채로 가볍게 만들어 사람들 마음에 스며든다.
문화강국론이 홍익인간 정신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결국 신화가 지향해 온 방향과 다르지 않다. 개인 상처를 공동체 서사로, 공동체 서사를 인류 보편 신화로 확장시키는 일. 한류는 그 확장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눈앞에서 증명하고 있는 살아있는 사례다.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던 근대의 다른 길과 달리, 이 길은 상징과 이야기와 정서로 세계 마음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세계 마음을 얻는 것은 오래된 신화들이 인류에게 가르쳐온 유일하게 지속 가능한 정복 방식 아닐까 생각해 보는 출근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