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동양미학의 가치를 인정받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들은 어떻게 서예의 정신과 만나고 있을까”경주읍성 독립서점 북샵 라벤더가 지난 19일 유오재에서 마련한 최경춘 서예가의 초청강연 ‘필무묵상(筆舞墨想)’은 이 질문에서 출발했다. 
 
이번 강연은 세계 무대에서 동양적 미학의 가치를 인정받은 한국 아티스트 4인, 백남준·김환기·이우환·이강소의 현대작품을 동양미학의 근간을 이루는 서예와 한자의 의미를 통해 다시 읽고, 나아가 최경춘 서예가의 필무묵상적 작품세계와도 접목해 서화 감상의 새로운 감상법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40년 가까이 붓을 잡아온 최경춘 서예가는 이날 강연에서 자신의 '필무묵상(筆舞墨想, 붓은 춤추고, 먹은 사유한다)'이라는 한 문장을 중심축으로 동양미학과 현대미술, 서예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며 "서예와 동양화를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혹은 더 가까이 느낄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강연의 첫머리에서 그는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를 통해 동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를 설명했다. 사물을 독립된 범주로 바라보는 서양과 달리 동양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 부분과 전체, 상황과 맥락을 중시한다는 것이다.최 작가는 이를 “동양의 먹은 안으로 스며드는 논리를 가지고 있고 서양의 물감은 밖으로 드러나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재료의 차이가 곧 두 문명의 사고방식 차이로 이어지는 것”이라며 예술의 재료에까지 연결했다.그가 말하는 동양미학의 핵심은 결국 ‘나-너’의 관계다. 자연을 정복과 개발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함께 어울리는 존재로 보는 시선, 개별 존재보다 관계와 전체를 중시하는 사고가 동양미학의 중요한 바탕이라는 설명이었다.이러한 동양적 사고가 현대미술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최 서예가는 백남준과 김환기의 작품세계로 시선을 옮겼다.백남준은 스스로를 ‘예술무당’이라 불렀다고 하면서 ‘巫(무당 무)’라는 한자의 형상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냈다. “백남준에게 인간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무언가와 무언가를 이어주는 존재였다”김환기에 대해서는 ‘점과 선’을 관계의 미학으로 해석했다. 김환기의 점 하나하나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무한히 연결되는 존재임을 강조했다.특히 ‘點(점)’과 ‘線(선)’이라는 한자의 의미를 풀어가며 김환기의 전면점화와 연결했다. 수만 개의 점이 모여 화면 전체를 이루듯, 하나의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이우환과 이강소의 작품에서는 ‘無(무)’를 키워드로 삼았다. 여기서 무는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고정되고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며, 존재와 존재 사이의 무한한 관계와 매개의 과정이라는 설명이었다.최 작가는 특히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만나 마찰을 일으키고 그곳에서 울림이 생긴다”면서 여백에 주목했다.
이우환의 점과 선, 이강소의 절제된 붓질과 넓은 여백을 통해 그는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감각을 설명했다. 반복되는 붓질도 똑같은 반복이 아니다. 붓의 압력과 먹의 농도, 속도에 따라 매 순간 다른 흔적이 만들어진다. 한 번뿐인 행위가 축적되면서 무한한 울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그는 이어 동양미학이 가장 압축적으로 담긴 예술로 서예를 꼽고 먹·선·절주미를 중심으로 서예의 본질을 풀었다.먼저 먹을 단순한 검정색이 아닌 ‘현색(玄色)’으로 설명했다. 서양의 검정이 흰색과 대비되는 하나의 색이라면 동양의 먹빛은 오묘하고 깊은 하늘의 빛을 품은 색이라는 것이다.“먹은 단순한 검정이 아닌 오방색을 품고 있는 색이며, 우주 만물의 빛깔을 함축하고 있는 색”이라고 강조했다. 노자의 ‘현지우현(玄之又玄), 중묘지문(衆妙之門)’을 끌어와 먹의 깊이를 설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먹의 농담과 번짐, 스밈은 화면에 단순한 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깊이와 사유의 공간을 만든다는 것.두 번째 키워드인 ‘선(線)’에서는 서예가 단순히 글자를 쓰는 기술이 아니라 온몸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임을 강조했다.붓을 종이에 대는 순간부터 떼는 순간까지 획은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완성된다. 같은 먹과 붓을 사용해도 붓의 속도와 힘, 먹의 농담에 따라 선은 전혀 다른 표정을 갖는다.이러한 ‘일회성’ 속에서 최 작가는 서예의 아름다움으로 ‘절주미(節奏美)’를 제시했다. 글자와 글자의 배열, 획의 움직임, 멈춤과 흐름에서 만들어지는 리듬이다.특히 절주미를 회호율·기복율·간격율로 나눠 설명했다. 붓을 거두는 과정에서 생기는 리듬, 획을 긋는 동안 붓의 오르내림에서 생기는 리듬,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이어지는 시간적 흐름의 리듬이다.“서예는 한 번 붓을 대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 그런데 바로 그 돌이킬 수 없음 속에서 형질미와 절주미, 기운미가 생겨난다”옛 서예이론의 ‘필단의연(筆斷意連)’, 즉 붓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는 말도 이 같은 서예의 리듬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소개됐다.강연의 끝 부분에서는 최 작가 자신의 작품세계로 이어졌다.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로 이어지는 순수 서예 작품부터 난초·대나무·매화·괴석·포도·나무를 소재로 한 수묵 문인화, 그리고 최근의 실험적 서화 작품까지 40년의 작업 여정을 살폈다.그는 초기 문인화에서는 선의 탄성과 선질을 중시했다면, 후기에는 먹이 번지는 ‘발묵’을 통해 먹 스스로 만들어내는 농담과 깊이를 화면에 담아왔다.
최근 작업에서는 김환기의 전면점화에서 착안해 글자의 필획으로 화면 전체를 채우는 작업도 선보였다. 하나하나의 필획이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가 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 빨강과 파랑 등 색채를 도입해 먹 속에 함축돼 있다고 본 오방색의 세계를 현대적으로 드러내는 실험도 이어가고 있다.최 서예가는 “김환기가 점으로 우주를 채웠다면, 저는 필획으로 화면을 채워 부분과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전통 서예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먹과 선, 여백과 색채를 통해 새로운 서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인 셈이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최 작가는 백남준의 ‘매개’, 김환기의 ‘점과 선’, 이우환과 이강소의 ‘無’, 서예의 먹과 선, 절주미, 그리고 자신의 ‘필무묵상’으로 이어진 여정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붓은 춤추고, 먹은 사유한다”40년 동안 붓을 잡아온 서예가가 건넨 이 짧은 문장은 이날 강연의 결론이자 동양미학을 바라보는 하나의 감상법이었다. 붓의 움직임을 따라 선의 호흡을 보고 먹의 농담을 따라 사유의 깊이를 느끼며, 비어 있는 여백에서도 존재의 울림을 발견하는 것이 그의 미학적 안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