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리스트(Blacklist)는 단죄하거나 보복하려고 골라놓은 인물들의 명단을 뜻한다. 영국 왕 찰스 2세가 부왕의 처형에 관여한 자들을 찾아 복수하려고 작성한 리스트였다. 현대에 와선 정부, 사법기관, 기업 등에서 반사회·반조직적 인물을 감시하거나 제재 또는 제거할 목적으로 작성해 관리하는 명단이란 의미로 통한다. 살생부(殺生簿)도 비슷한 용어인데, 여기엔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구분해 모두 적는다는 차이가 있다.블랙 리스트는 과거엔 정부나 공안기관, 대기업 등에서 반체제 인사, 운동권 핵심, 노동조합 간부 등을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요즘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과거 피해자임을 호소했던 노조가 블랙 리스트를 작성해 반대파나 비협조자들을 색출·관리하고 협박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최근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 지부(삼성전자 초기업노조) 위원장과 핵심 간부가 노조 미가입자 명단을 만들어 유출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믿기지 않을 정도다. 사법기관 기록대로면 악의적으로 블랙 리스트를 작성해 활용하려 한 전형적 사례 아닌가. 게다가 살생부를 만들어 피아를 구분하고 관리하겠다는 말을 공식화한 건, 이런 행위가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인 범죄라는 문제의식 자체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의 양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의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24년 첫 총파업 주도 과정에서 파업 불참자를 사내 소통방과 민간 메신저 등에서 '배신자', '무임승차자'로 공공연히 조롱하고 비방하는 등 압박을 넘어 심리적 매장 행위를 거리낌 없이 했다. 삼전 노조 블랙 리스트 사태는 역설적이다. 블랙 리스트의 피해자도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새삼 입증했다. 무엇보다 악(惡)은 악인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들에 의해 일상에서 구현된다는, 미국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론이 떠오른다. 아렌트에 따르면 거악(巨惡)은 사악한 성품이 아니라 비판적 자의식과 성찰 없이 역할에 충실한 평범한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다. 특히 각 개인이 비판적 사유 능력을 상실하고 집단주의, 전체주의가 강한 사회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지금 한국 사회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