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옥은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복원하는 집이 아닙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공간을 비우고 채우는 방식, 장소의 기억을 존중하는 건축 정신을 현대의 삶 속에 다시 심는 일입니다”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6 한옥문화박람회’에서는 이러한 명제에 주목한 건축가의 강연이 펼쳐졌다. 지난 10일, 손명문 건축사사무소 건·환 대표가 ‘전통을 잇는 현대건축-경주사례로 살펴보는 한옥의 정신과 미래’를 주제로, 전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전통 공간철학을 현대의 건축언어로 번역하는 접점에 대해 짚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세계국가유산산업전’과 함께 열린 한옥문화박람회는 ‘오늘의 한옥, 일상이 되다’를 대주제로 마련됐다. 손 건축가는 강연을 열면서 한옥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선에 질문을 던졌다. “전통이란 한옥의 형식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한옥의 외형을 이야기하기보다 한옥의 정신과 공간철학을 통해 전통의 계승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그가 주목한 것은 지붕의 곡선이나 목재의 형태 같은 한옥의 외형이 아니었다. 자연과 건축의 관계, 비움과 여백, 공간을 한꺼번에 드러내지 않는 방식,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재료의 아름다움 등 한옥에 깃든 공간적 태도였다.
경주의 한옥 사례로는 양동마을과 황남마을을 들었다. 양동마을이 전통건축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황남마을과 황리단길 일대는 오래된 한옥과 새로운 쓰임이 만나 전통이 현재형으로 흐르는 공간이라는 설명이었다.그는 황리단길 일대의 대릉원, 숭혜전, 1894 사랑채, 카페 1909, 황남정미소, 올리브카페 등의 사례를 통해 오래된 건축과 마을이 어떻게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지속가능한 마을 디자인은 오래되고 낡은 것을 철거하고 교체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래된 공간을 역사와 함께 살아 있는 유기체로 재생시키는 작업입니다”그러면서 전통건축의 공간철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우리 건축은 한 번에 전체를 보여주지 않고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갑니다”며 영주 부석사와 안동 병산서원, 경주 독락당 계정·종오정·서백당 등을 차례로 소개했다.부석사는 공간을 한눈에 펼쳐 보이지 않는 건축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됐다. 건축물을 향해 걸어가는 진입 과정에서 공간이 하나씩 열리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다.병산서원과 독락당 계정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했다. 특히 주변의 자연환경을 통해 자연과 건축이 일체가 돼있으며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관계망 속에 놓여 있다는 ‘물아일체’의 공간철학을 설명했다.경주 서백당은 월성 손씨 종가로서 조선 전기 양반가옥의 구조와 배치 형식을 잘 간직한 사례로 소개됐다. 종오정은 조선 영조 때 학자 최치덕이 건립한 정자로, 자연과의 조화와 절제된 조형미, 유학자의 수양공간이라는 기능이 함께 살아 있는 조선 후기 전통건축과 조경의 정수로 평가했다.
손 건축가는 이 같은 전통건축의 공간철학이 오늘날의 한옥에서도 충분히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그 사례로 테라로사 경주와 신라헌, 황남관, 소설재 등으로 제시했다.특히 ‘테라로사 경주’에 대해서는 서원과 사찰, 전통주택에서 볼 수 있는 공간적 시퀀스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사례라고 설명했다.“한옥의 겉모습보다 건물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주변 환경과 공간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이는 한옥을 단순히 전통적인 모양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재료와 공법, 구조기술을 활용해 전통의 정신을 새로운 공간으로 구현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손 건축가는 ‘좋은 건축은 건축주의 안목과 설계자에 대한 신뢰 속에서 이뤄진다’며 테라로사와 신라헌 건축주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손 건축사는 한옥의 매력으로 ‘비움’도 꼽았다. 집이 자연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도록 하는 것, 건축과 자연 사이에 여백을 두는 것이 한옥의 중요한 가치라는 설명이었다.이어 손 건축가는 ‘건축은 브랜딩이 아니라 장소에 관한 이야기’라며 현대건축이 지나치게 외형과 이미지 중심으로 소비되는 현실에 대해 우려했다.특정 장소만이 가진 역사와 환경, 기억을 발견하고 이를 공간으로 빚어내는 과정이 건축의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역사적 장소인 경주에서는 이 같은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경주는 역사밀도가 높은 도시이자 역사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조들로부터 좋은 도시를 물려받았고 우리도 좋은 도시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합니다”그러면서 경주가 ‘과거만 남은 도시’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도시의 문화는 시민의 현재를 반영해야 하고 유산은 배경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도시는 멈추게 됩니다”한옥의 유지와 관리 등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도 이어졌다. 자연재료로 만들어진 한옥은 시간이 흐르면서 재료가 변하고 익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름답지만, 그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방적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오일스테인 도장, 목재의 수축·팽창에 따른 틈새 관리와 사춤 미장, 흰개미와 습기 방지, 기와와 지붕 및 창호 관리, 건조목재와 보전·재사용, 하이브리드 창호와 벽체, 지자체 지원제도 등을 꾸준히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손 건축가는 ‘전통건축의 본질은 형태가 아닌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공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며 강연의 마지막 메시지를 명확히 했다.“고전은 정지된 것이지만 전통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라며 전통의 의미를 현재와 미래의 관점에서 다시 정의했다.“전통은 오늘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의 연결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이날 강연은 한옥의 미래가 옛 모양을 얼마나 닮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오늘의 도시와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구체적으로 방증했다.
손명문 건축가의 대표적인 한옥작품으로는 테라로사 경주, 신라헌, 황남관, 소설재 외에도 비체보게트, 위연재, 월성과자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