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에 출근해 밤 10시쯤 집에 들어갑니다. 정말 일 하러 고향 경주에 왔습니다. 그저 제가 바라는 것은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취임 석 달여의 경주문화재단 정지영 대표(59). 아직 부임 초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시간이다. 그러나 정지영 경주문화재단 대표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몇 년째 경주문화재단을 이끌어온 수장처럼 느껴진다.    짧은 기간에도 경주의 문화예술 현장을 쉼 없이 찾아다니며 지역의 흐름을 읽고 조직과 사업을 들여다보며 자신만의 문화지도를 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경주예술의전당에서 그를 만났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공부하는’ 대표의 모습이다. 최근 새롭게 문을 연 문화공간과 기존 문화예술단체, 각 축제 현장을 찾고 신라문화유산은 물론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경주의 공간까지 직접 발품을 팔아 확인한다.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경주의 현재를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정 대표는 경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이후 서울에서 생활했다. KBS에서 33년간 콘텐츠 기획과 문화사업, 조직경영 등을 두루 경험한 뒤 다시 고향 경주로 돌아왔다. 그는 “서울에 있을 때도 경주가 고향이라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경주에서 태어난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요즘 그의 주말은 '라원'과 '문무해양역사관' 등 새로운 경주를 찾아가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제가 미처 몰랐던 경주를 찾아다니는 게 호사를 누리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이런 정 대표의 곁에는 그의 감각적 안목의 표식과도 같은 노란색 폭스바겐이 함께한다.    경주의 골목과 문화공간, 유적과 공연·전시장을 찾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결국 문화재단의 사업 구상으로 이어진다. 그는 자신의 이런 행보를 ‘경주 전체의 문화예술지도를 머릿속에 만드는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대표는 방향을 제시하고 직원의 전문성은 존중해야”   정 대표가 짧은 시간 안에 재단의 업무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KBS에서 쌓은 경험도 한몫하고 있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조직을 운영하며 많은 사람과 프로젝트를 만나온 경험이 경주라는 도시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경주문화재단의 가장 큰 강점으로 젊고 역량 있는 직원을 꼽았다. 인턴을 포함해 33명이 일하고 있는 조직에서 구성원들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이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대표의 역할이라는 생각에서다. “대표는 책임 있는 결정을 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정도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그가 운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도 분명하다. ‘시민’, ‘지역예술인’, ‘청년’, ‘미래세대’, ‘절차의 투명성’, ‘결과의 정당성’, ‘재단 직원들의 전문성 존중’이다.   특히 조직문화에 대해서는 변화를 예고했다. 대표가 직원 평가에 직접 행사하던 30%의 권한을 내려놓고 상향평가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를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직원들도 상급자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사무국장과 팀장들에게 권한을 더 주면서 동시에 그들도 평가받게 하려고 합니다. 좀 더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됐으면 합니다”   재단 직원들의 처우 개선도 과제로 꼽았다. 조직의 역사가 길지 않아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고, 젊은 직원들의 처우 역시 재단의 성과와 연동해 지속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신라문화제, 세계인이 즐기는 축제로”   정 대표가 취임 후 가장 깊이 들여다본 사업 가운데 하나는 신라문화제다. 경주를 대표하는 대형 축제인 만큼 콘텐츠의 완성도를 높이고 세계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에서다.   특히 메인 콘텐츠인 ‘화백제전’에서는 올해, 의전행사를 대폭 줄이고 외국인 관광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사를 최소화하면서 시각적 연출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또 관람객 누구나 공연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무대 구조에도 변화를 줬다.   지난해 월정교 수상 무대가 수면에서 약 90㎝ 높이였다면, 올해는 2m70cm로 높이고 입체적인 스탠딩 지그재그 슬로프 형태로 무대를 구성해 객석 어디에서든 무대가 잘 보이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전했다. 또 경주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경주를 상징하는 이야기를 대사로 길게 설명하기보다 시각적으로 풀어낼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실크로드 페스타’에는 올해 101년 역사를 이어온 동춘서커스가 참여한다. 경주 출신인 단장과의 인연도 의미를 더한다. 또 내년에는 행사 무대를 경주읍성까지 확장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었다. “신라문화제는 관광 이벤트이면서 문화예술 이벤트이고 관광 효과까지 누려야 하는 콘텐츠라서 쉽지 않습니다. 여러 시도를 통해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단의 또 다른 변화는 지역예술인과 시민 참여 확대에 있다. 봉황대뮤직스퀘어와 찾아가는 문화르네상스공연 등에서는 올해부터 메인 공연에 앞서 지역예술인들이 참여하는 무대를 유료로 의무화했다. 신라문화제 버스킹과 청년작가 프로그램, 알천미술관 전시, G아트마켓 등도 지역문화 생태계와 연결되는 사업으로 꼽았다.   ◆“젊게, 그러나 세대의 다양성은 놓치지 않겠다”   정 대표가 그리고 있는 내년 재단의 방향은 ‘젊음’이다. 지역작가 전시에서 청년작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고 공연 역시 보다 젊은 감각으로 구성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특정 세대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의 다양성은 지키겠다는 생각이다.   최근 봉황대뮤직스퀘어에서 열린 ‘크라잉넛’ 공연은 그에게 새로운 발견이었다. 중장년 관객들이 록밴드 공연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문화 취향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이에 따라 봉황대뮤직스퀘어는 관광객 중심 공연으로, 경주예술의전당 화랑홀은 탑급 브랜드와 다양한 장르의 공연으로, 찾아가는 문화르네상스공연은 중장년층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각각 색깔을 분명히 해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콘텐츠의 외연도 넓힌다. 내년 2월, KBS국악관현악단의 경주예술의전당 공연이 확정됐고 경주홍보대사 가수 이수연과의 협업도 준비하고 있다. 피아니스트와 아이돌 등 경주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출연진과의 협업도 추진 중이다. 1월에는 4년 만에 뮤지컬 ‘캣츠’ 오리지널팀 공연도 예정돼 있다.   KBS와 연계한 콘텐츠도 염두에 두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다룬 대하드라마 ‘문무’와 연계한 뮤지컬 공연 역시 검토하고 있다.   ◆“경주예술의전당은 시민의 공간…2030년 이후를 준비해야”   경주예술의전당 공간 활용에 대해서는 운영권 문제 등 현실적인 제약도 설명했다. 2010년 건립 당시 BTL 방식으로 운영돼 현재 운영권이 ㈜GSI에 있으며, 2030년 8월 이후 경주시가 온전한 운영권을 갖게 된다. 전당의 공간 활용도를 높이는 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2층에는 커피숍 입점이 추진되고 있으며 지하에는 갤러리를 추가해 지역예술인들의 전시공간을 늘이고 경주예총 사무실 등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APEC 이후 경주의 국제문화도시 브랜드를 이어가는 것도 재단의 과제다. 경주예술의전당 곳곳에 2025 APEC CEO SUMMIT 관련 아카이브를 전시하고 시민들이 이를 자연스럽게 접하도록 한 것도 그 일환이다.그는 경주가 가진 문화적 자산을 하나의 콘텐츠로 묶어내는 일에 대해서도 의지를 보였다. ‘세계경주포럼’과 같은 국제문화행사를 재단이 맡게 된다면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구상도 전했다.   ◆“경주의 문화예술지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문화재단이 안고 있는 현실적인 고민도 있다. 시 산하 공공기관이라는 특성상 예산과 회계, 조례와 규정 등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는 만큼 민간조직처럼 빠르게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공연 출연료와 물가가 크게 오른 상황에서 예산 문제는 가장 큰 현실적 과제로 꼽았다. 같은 예산으로 공연과 축제의 질을 유지하려면 횟수나 규모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사업에 맞춰 인력과 운영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주문도 덧붙였다. 지금, 정 대표가 지금 가장 집중하는 것은 ‘경주를 더 많이 아는 것’이다. 재단이 주관하지 않는 행사까지 찾아가고 지역의 예술가와 문화기획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어린 시절 보았던 경주와 지금의 경주 곳곳을 직접 걸으며 새로운 문화의 결을 발견하고 변화하는 문화현장을 살핀다. 그리고 그 지도 위에 경주문화재단의 새로운 역할과 정체성을 그려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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