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누구나 ‘님’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님이 될 수 있고, 오래 떠나온 고향이 님이 될 수도 있다. 평생 붙들고 살아온 학문이 학자의 님이 되고, 음악이 음악가의 님이 되며, 한 그루 나무와 저녁노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까지 님이 될 수 있다. 님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하는 것도, 곁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재할 때 더욱 선명해지는 존재가 님인지도 모른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 「군말」에서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고 했다. 이 한 문장으로 ‘님’의 세계는 연인을 넘어 종교와 철학, 자연과 예술, 삶의 모든 사랑하는 대상으로 넓어진다. 무엇인가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오래 기루었다면 그것 역시 님이 된다.
여기에서 ‘기루다’라는 말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김재홍의 『시어사전』은 이를 만해가 태어난 홍성 지역의 말로 보며 ‘그리워하다, 사랑하다, 마음에 두고 키우다, 정을 두다’ 등의 뜻으로 풀이한다. 누군가를 기룬다는 것은 단순히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오래 살아가는 일이다. 얼굴을 마음속에서 다시 그리고, 함께했던 시간을 되살리고, 아직 오지 않은 만남까지 기다리며 한 존재를 내 안에서 키우는 일이다.
그리움과 ‘그리다’가 묘하게 맞닿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리운 사람은 마음속에서 자꾸 그려진다. 눈을 감으면 얼굴이 떠오르고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며 함께 걷던 길까지 살아난다. 그림이 빈 종이에 선을 더해 형상을 만들어 가는 일이라면, 그리움은 마음의 여백에 한 존재를 끊임없이 그려 넣는 일이다.
그래서 그리움은 비어 있음이면서 동시에 채워짐이다. 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립지만,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는 내 안에 더욱 깊이 존재한다. 부재가 존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명하게 만드는 역설이다. 님은 손으로 붙잡아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리워함으로 마음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새싹도 그렇다. 겨울 동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땅에서 어느 날 작은 싹 하나가 올라온다. 그러나 그 생명은 그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오래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움 역시 마음속에서 그렇게 움튼다. 한 번 바라본 눈빛, 함께 마신 차 한 잔, 비 오는 날 건네받은 우산, 헤어질 때 잡았던 손의 온기가 마음 깊은 곳에 내려앉았다가 어느 저녁 문득 새싹처럼 올라온다. 기다림은 그 새싹을 기르는 시간이다. 불교 ‘중생(衆生)’도 이런 의미에서 다시 바라볼 수 있다. 중생은 단순히 어리석고 욕망에 빠진 인간을 뜻하는 말로만 볼 수 없다. 산스크리트어 ‘sattva’를 옮긴 말로,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가리킨다. 현장법사는 이를 ‘유정(有情)’이라 번역했다. 말 그대로 정이 있고 감정을 가진 존재다.
‘유정’이라는 두 글자는 인간을 아름답고도 슬프게 설명한다. 우리는 정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워한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지 않았다면 떠남도 그토록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가면서 부모와 자식,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속에 들인다. 때로는 한 마리 동물과 오래 살았던 집, 고향과 나무 한 그루, 바다 하나까지 마음에 들여놓는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사랑하는 만큼 걱정하고 가까워진 만큼 이별을 두려워하며, 함께했던 만큼 떠난 뒤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구속 때문에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누군가 귀가를 기다리고, 늦은 밤 잘 들어갔는지 걱정하고, 아픈 사람 이마에 손을 얹는다. 아무에게도 마음이 묶이지 않는 자유보다 누군가를 걱정해야 하는 작은 구속이 삶을 더 따뜻하게 만들기도 한다.
죽음이 슬픈 이유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죽음은 한 생명의 끝인 동시에 마음속에서 오래 기루어 온 존재와 물리적인 단절이다. 그러나 인간은 떠난 존재를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 시로 쓰고,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로 부르며 기억한다. 현실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예술 속에서 불러낸다. 때문에 모든 예술의 내면에는 그리움이 있다. 시인은 사라지는 것을 언어로 붙잡고, 화가는 지나가는 순간을 화면에 남기며, 음악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을 선율로 기룬다. 예술은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인간의 오래된 몸짓이다.
만해는 「군말」의 끝에서 자신을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에 겹쳐놓는다. 해는 저물고 벌판은 넓으며 돌아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뜻이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길을 잃을 수도 없다. 그리워하는 존재가 없다면 기다릴 이유도 없다. 어쩌면 그리움은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내 삶의 한 방향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리움 때문에 헤매면서도 바로 그 그리움 때문에 다시 길을 찾는다.
나이 들수록 마음속 님은 많아진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먼저 떠난 사람, 돌아갈 수 없는 고향집, 어린 시절 골목, 오래전 들었던 음악, 이루지 못한 꿈까지 님이 된다. 시간은 많은 것을 가져가지만 이상하게도 그리움까지 가져가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기루다’라는 말은 더욱 귀하다. 그리움은 사라진 것을 붙잡고 우는 감정만이 아니다. 한 존재를 마음속에 심어 오래 키우는 일이다. 사랑했던 얼굴을 지우지 않고, 함께했던 시간을 버리지 않으며, 그에게서 받은 온기를 다시 다른 존재에게 건네는 일이다.
님만 님이 아니다. 내가 오래 바라본 것,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것, 떠올리면 따뜻하면서도 아픈 것, 내가 마음속에서 오래 기룬 것은 모두 님이다. 그렇다면 그리움에 길을 잃은 나는 누구인가.
아마도 길을 잃은 사람이기 전에 누군가를 마음에 들인 사람일 것이다. 한 존재를 너무 깊이 기루어 그 사람이 없는 길에서 잠시 방향을 잃어버린 유정의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그리움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너무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해 저문 벌판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아직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뜻이며, 아직 사랑할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평생 님을 그리고,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기루면서 해 저문 벌판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한 마리 유정의 존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