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영화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일어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다.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예술에는 상상할 자유가 있고, 우리 사회는 그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논란은 영화 한 편의 옳고 그름을 넘어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역사적 사실과 예술적 상상력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우리는 역사를 바라볼 때 과연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가.최근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는 눈길을 끈다. 개혁신당의 정책연구기관인 개혁연구원이 지난 9월 29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가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배후에 의문을 제기한 것을 ‘역사 왜곡’에 가깝다고 본 응답은 58.2%, ‘창작의 자유’에 가깝다고 본 응답은 27.6%였다.더욱 주목할 대목은 세대별 결과다. 30대의 73.8%, 18~29세의 65.7%가 ‘역사 왜곡’에 가깝다고 답했다. 1974년의 비극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서도 이 같은 응답이 높게 나타났다.나는 이 결과를 진보와 보수라는 익숙한 잣대로만 해석하고 싶지 않다. 젊은 세대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왜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가.”같은 조사에서 정치권이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문제 삼는 기준이 ‘일관적이지 않다’고 답한 사람은 58.3%였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공정은 내 편과 상대편에게 다른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역사적 사실에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고, 고인의 명예에도 진영이 따로 있을 수 없다.물론 예술에는 창작의 자유가 있고, 그 자유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특히 실존 인물의 삶과 죽음이 얽힌 우리 사회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한 현대사를 다룰 때에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불편한 작품을 정치의 힘으로 없애는 것이 답은 아니다. 좋은 민주주의는 불편한 표현까지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시민에게는 그 표현을 비판하고 질문할 자유가 있다. 창작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는 함께 존재해야 한다.정치가 해야 할 일도 여기에 있다. 영화를 진영대결의 또 다른 전쟁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왜 국민들이 역사 문제에서 ‘이중잣대’를 느끼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정치는 상대편의 잘못을 찾아내는 기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정치의 품격이다.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과 갈등을 들여다보아 왔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서로에게 다른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할 때 깊어진다. 부부도 그렇고, 부모와 자녀도 그렇고, 조직도 그렇다.정치도 다르지 않다.내 편의 잘못에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상대편의 잘못에는 원칙을 이야기한다면 신뢰는 무너진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은 거창하지 않다. 나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상대에게도 적용하는 것이다.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도 과거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를 통해 오늘을 성찰하고, 더 나은 내일로 가기 위해서다. 지난해 나는 육영수 여사를 기억하며 한 편의 글을 썼다. 그분을 특정 정치 진영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 한 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으로, 국민의 아픔 곁으로 다가가려 했던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싶었다.한 사람의 공과를 평가하는 것은 자유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 역시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평가와 사실은 구별되어야 한다.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사실까지 달라져서는 안 된다.지금 우리 정치에 필요한 것은 상대를 이기는 또 하나의 논리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 함께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다.사실 앞에서는 정직하고, 사람 앞에서는 존중하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 신뢰를 회복하는 시작이라고 나는 믿는다.어쩌면 지금 20·30대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이것인지 모른다.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습니까?”역사 앞에서 우리는 과연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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