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0년 조선 숙종 때 집권 세력인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주도권을 잡았다. 이른바 '경신환국'이다. 환국(換局)은 정치판을 뒤바꾼다는 뜻이다. 서인이 승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 갈등에 휩싸였다. 남인에 대한 처벌 수위와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균열이 생겼다. 결국 서인은 송시열 등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 노론과 윤증 등과 연결된 온건파 소론으로 갈라졌다.조선의 붕당 정치는 인사 문제를 계기로 본격화됐다. 1575년 선조 때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갈등으로 조정이 양분됐다. 이조전랑은 품계가 높진 않았지만, 요직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이 다툼으로 동인과 서인이 생겨났다. 이후 당파 분열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동인은 반대파인 서인에 대한 처벌 문제 등을 놓고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서인 역시 남인 처벌 문제와 내부 주도권 다툼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당파는 어김없이 분열했다. 그 중심에는 인사권과 상대 당파에 대한 처벌 문제가 있었다.현 여권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 2일 검찰청이 문을 닫고 공소청이 출범하면서 검찰개혁 세력이 승리했지만, 중대범죄수사청장 인선을 놓고 여권이 둘로 갈렸다. 갈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권 경쟁에서 불거진 친명·친청 간 대립은 신천지의 전당대회 개입 의혹을 둘러싸고 재연될 조짐이다. 지금 여권은 같은 편끼리 죽기 살기로 싸우는 형국이다. 당 안에서 의견이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에 '반명'이라는 낙인을 찍거나 개혁을 내세워 대통령의 인사권까지 좌우하려는 태도는 도를 넘은 것이다. 양쪽 모두 상대를 동지가 아니라 정리 대상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당파 싸움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임금이 영조다. 그는 1742년 성균관 반수교 위에 '탕평비'를 세웠다. 비석에는 "두루 어울리되 패거리를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라는 취지의 글을 직접 써 새겼다. 피비린내 나는 당쟁을 지켜본 왕의 다짐이었다. 조선의 당파 정치가 병든 것은 진영 내 이견 때문이 아니었다. 이견을 배신으로 몰고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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