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읍 능산리 오석산 기슭에는 백제 사비기 왕릉으로 추정되는 대형고분 여러 기가 있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능산리 고분군이라 불리며 오랫동안 능의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1993년 주변의 발굴조사로 왕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당시 부여군이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 사이에 주차장을 조성하면서 우연히 절터가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백제 문화의 유물들이 다소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와 국보 제288호 석조사리감인데 이 석조사리감에는 “백제 창왕 13년(567)에 왕의 누이 형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창왕은 곧 위덕왕이고 형(兄) 공주는 위덕왕의 누이이자 성왕의 딸이다. 이 기록은 능산리 사지가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찰이면서 성왕의 명복을 비는 능사(陵寺)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절터는 왕릉을 위한 사찰이었기 때문에 바로 옆 고분군 또한 백제왕릉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능산리 고분군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봉분 7개가 모여 있는 중앙고분군으로 이곳을 일반적으로 백제왕릉원으로 부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2호분이 26대 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내부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1호분은 학계에서 성왕의 아들 27대 위덕왕의 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고분의 내부구조는 횡혈식이고 모두 도굴된 상태로 조사되어 무령왕릉처럼 누구의 고분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공주의 무령왕릉은 조사 당시 지석에서 무령왕은 62세에 사망하였고 523년에 장례가 치러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주인과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었다. 그럼 당시 백제왕릉은 풍수 입지 조건을 어느 정도 반영하였을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능산리의 7기 고분이 전통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지세와 일치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풍수에서 땅의 길흉을 분석할 때는 ‘지리오결’이라고 하는 용·혈·사·수·향을 하나씩 따져 그 땅의 길흉을 분석한다. 그런데 능산리의 경우 집단으로 고분군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지리오결 보다는 왕실과 멀지 않고 양지바른 남향만을 우선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풍수적 길흉 판단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았다기보다는 왕실과의 접근성 및 관리의 편의성을 중시하고, 왕실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사후세계에도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계속 이어져 오는데 조선조『경국대전』에서는 능역을 한양성 사대문 밖 100리 이내에 두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선대 왕릉을 자주 참배하고 국왕이 능행 도중 변고가 발생하더라도 신속히 환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능산리 고분군 역시 배산임수 등 풍수적 요소를 일정 부분 반영하면서도, 왕실과의 거리와 정치적 상징성을 함께 고려하여 조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초부터 자생풍수가 있었으나 중국의 이론풍수가 도입된 시기는 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므로 당시의 묘지 조성에는 아직 제대로 정립된 풍수 이론이 적용되었다기보다는 상기의 여러 조건들을 복합적으로 적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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