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오릉은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경내에는 총 다섯 기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무덤의 주인공들은 신라 제1대 왕 박혁거세와 그의 부인 알영 왕비 그리고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네 분의 왕을 담엄사 북쪽 사릉원 내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다.   이들 능의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 시내에 있는 다른 신라 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무덤으로, 1호 무덤은 높이 7.86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 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오릉의 경내에는 상기 다섯 분 들의 제향을 받드는 숭덕전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고, 그 옆에는 알영부인의 탄생지라 전해지는 알영정(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보존 가치가 높아 1969년 국가문화유산 사적 제17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왕릉(오릉)이 박혁거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조성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에는 아직 중국에서 유행하던 이론풍수가 도입되기 이전이고, 국내에서는 당시 자생풍수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신라왕릉을 보면 제27대 선덕여왕릉부터는 대부분 산지에 입지하고 있어 풍수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이나 그 이전의 왕릉은 거의가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풍수 입지를 적용했다기보다는 그냥 지리적 조건과 양지바른 곳을 찾아 능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이론풍수가 제대로 정립된 현시점에서 볼 때 오릉은 과연 풍수적 명당일까 흉당일까?   먼저 이곳의 산세는 낙동정맥인 울주군 백운산(892m)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올라온 지맥이 경주 남산의 끝자락인 도당산에 이르고, 오릉은 도당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뻗어나간 용맥 상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도당산과 오릉 사이가 모두 전답으로 이루어져 중심 용맥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오릉에서 뒤편의 도당산을 똑바로 쳐다보았을 때 중심선에서 좌·우측으로는 멀어질수록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그리고 도당산에서 들판을 지나 오릉까지의 높낮이도 차츰 낮아지고 있어 오릉이 중심 용맥 상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릉은 혈의 사상으로 보아 넓은 와형(窩形)의 혈장이지만 혈장 주변으로는 인작(人作) 외에 자연적 선익이나 입수 등의 혈증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주변의 사신사도 없어 전후좌우에 소나무 숲을 조성하였고, 사방으로 토석 담장까지 세웠으나 거리나 높이로 볼 때 장풍국(藏風局)을 이루어주지는 못한다. 수세는 동쪽 토함산 자락에서 흘러나오는 남천이 오릉의 북편으로 흐르고, 남측은 약간의 거리감은 있으나 금강저수지에서 흘러나온 소하천이 서쪽으로 흘러 형산강에 합류한다.   그러나 북편으로 흐르는 남천의 물길이 혈장을 둥글게 감싸주지를 못하고 비주(反弓) 하면서 흘러 영역 내의 생기를 오히려 뺏어나간다.   이를 볼 때 당시에는 아직 제대로 정립된 풍수 이론을 적용했다기보다는 궁궐과 가깝고 양지바른 곳을 찾아 능지로 사용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므로 약 4~5세기 이전의 초기 신라왕릉은 대부분이 풍수적 길지라 할 수 없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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