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양육강식의 동물적 본능에 의해 발생되었을 것이다. 먹이사슬의 순차적 행위로 굳어진 것이 현대사회에 이르면서 아주 기술적으로 발달해 왔다. 폭력의 가장 광범위한 피해는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은 또 다른 전쟁으로 번진다. 영역싸움에서 비롯된 전쟁이 끝내 종교와 이념의 전쟁으로 성장했다. 전쟁을 일으키는 목적의 당위성은 아주 잔인해서 절대적 악마성을 지닌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오류는 동류의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의 정당화다.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라는 자가 다른 이의 몸에 칼을 박았다. 이건 전쟁의 축소판인 모순이다. 이웃집 개도 함부로 칼로 찔러서는 안 된다. 전쟁을 대비한 한미합동훈련 반대라는 목적성을 내세우지만 그는 폭력으로 평화의 정당성을 죽인 결과에 이르렀다. 자가당착이란 이런 경우에 적합하다. 우리나라의 품위를 훼손한 이 일은 보수와 진보, 그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사건이다. 어느 집단이나 골수분자들이 있다. 군사전문가 리영희교수의 저서에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있다. 그 둘의 균형으로 새는 날 수 있다. 사회적 이념도 그와 같다. 어느 한 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침은 불균형을 초래한다. 이 일이 일부 급진적 좌파들에게는 환영 받을지 모르겠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 언제인데, 그야말로 '공산의 추억'에 불과한 좌파들의 눈에 억압 받는 북한의 인민들이 보이지 않고, 그럴싸한 계급장만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또 하나의 조롱거리가 외신을 탔다. 어이없는 개고기 선물과 현란한 부채춤, 이 날씨에 난데없는 길거리 발레단, 아직 어린 청소년들이 악을 쓰는 난타 공연. 어느 종교집단의 기획인 모양인데 이 현상은 사대주의와 종교적 신봉을 내포한 위험한 발상이다. 죄인을 심판할 사법부가 존재하는 국가에서 석고대죄를 표방한 단식투쟁까지. 아주 '난리부르스'라는 우스개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겠다. 명색이 명문대를 나왔다는 양반이 서양인들 개고기 혐오증의 기본적인 상식을 모르는 것도 수상하다. 더구나 대사는 애견인이다. 쾌유를 바라는 조용한 기도회라면 몰라도 피해자는 앓고 있는데, 흡사 무당옷처럼 화려한 차림새의 부채춤, 집단적 발레에 북을 치고 그야말로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에서는 북한의 기계적인 매스게임을 연상하며 비웃는 글들이 도배가 되었다. 사상의 세뇌나 종교의 세뇌나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개인의 견해는 집단의 배반이 된다. 지시하는 쪽의 두뇌만 필요한 상태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정권은 미워해도 거기 물든 북한인민들까지 미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유와 인권의 자존감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이다. 사고의 능력을 거세당한 이들은 자발적 족쇄에 묶여 가치관조차 성찰할 능력이 없다. 비이성적 행동을 한 종교인들도 그러하다. 중년의 아낙부터 풋풋한 청소년까지 그들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위로와 수치의 분간 없는 그들의 지도자가 문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는 새로운 발견을 했다. 이타심과 의타심의 혼재된 양상 속에서 주권국가의 국민을 포기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외교관계로 우리 땅에 머무르는 외국인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은 대단히 큰 잘못이다. 그 어떤 해명도 정당화 될 수 없다. 3대 세습의 세계의 유래가 없는 북한 정권을 향한 종북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인이나 베트남인이 아닌 미국인의 피해에 정신 나간 굿판과 단식을 벌이는 종미도 분명 우리 국민으로서의 자격미달로 부끄러운 일이다.이 화 리소설가, 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