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청소년기의 불안을 잘 표현하고 있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소년은 양수에 잠기듯 모호한 알 속의 세계에서 벽을 쪼는 시기다. 껍질 밖의 무수한 소리가 궁금하여 시간의 완고함을 파괴하고 싶다. 누구나 겪는 사춘기는 이상한 시기가 아니라, 수상한 의문으로 혼란한 시기다. 다 겪고도 잊은 어른들은 그것을 방황이라 치부하고, 본인들은 그것을 고뇌라고 말한다. 세상에 나쁜 아이는 없다. 나쁜 세상이 나쁜 아이를 만든다. 가난한 집이든 부잣집이든, 애초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 모든 탄생은 우연의 순수한 인연이며 설명 없이 축복 받아야한다. 성장의 과정은 어른들에게 배운다. 공자를 숭상하는 이 나라에서 어른이라는 특권은 무소불위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들은 무조건 어른의 말씀을 따라야한다는 우리의 법칙이다. 어른들만의 논리로 무장된 이 위험한 법이 21세기에도 유효할까? 내가 아는 한 남자가 아이를 때렸다. 손의 절반에 검푸른 멍이 들 정도로 때렸다. 멍은 손바닥도 시퍼렇게 물들였다. 나는 그런 손을 본 적이 없다. 성인남자의 손이 그 지경이면 단순 폭력이 아니다. 일정 시간 이상의 무지막지 힘이 가해진 폭력이라야 가능하다. 물리적 폭력은 언어폭력을 동반한다. 언어폭력은 물리적 폭력의 타당성을 대변하기 위한 장치다. 두 폭력은 교차 접합되면서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피해자는 몸과 정신 모두 상처를 입는다. 상처는 자존감의 절망적 트라우마가 된다. 폭력의 상흔은 삶을 성공보다 실패로 이끄는 속성이 있다. 그 아이는 서너 너 댓살도, 예닐곱 살도 아닌, 소녀이기 때문이다.  소녀를 때린 그 남자는, 자비를 중요시하는 불교신자다. 오래 전부터 이 도시를 벗어난 광범위한 곳까지 아우르는 불교모임을 결성해 이끌고 있다. 그는 또 아름답고 솔직한 문학 장르인 수필을 쓰는 문필가다. 더욱 놀랄 일은, 그가 바로 소녀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그는 이 외에도 각 단체의 '그 무엇'이다. 지금도 충분히 바쁜 그는 식욕이 지나치게 왕성한 벌처럼 '그 무엇'을 찾아다니는, 사회지도층이다. 여중생은 다 자란 듯 덜 자란 꽃봉오리다. 봄의 물기 머금은 뿌리는 천방지축 땅의 깊이나 넓이도 모른 채 꽃대를 훌쩍 키운다. 이 멀쑥한 꽃대는 바람 앞에서 유약하다. 비틀려 휘어지거나 꺾이지 않게 어른은 지주대가 되어 주어야 한다. 스스로 바르지 못하다고 짓밟아서는 안 된다. 첫 꽃물이 어리둥절한 어린 소녀에게 그러면 안 된다. 어른과 아이의 정점에 사춘기가 존재한다. 어쩌다 몸의 치수는 어른과 맞먹어도 정신은 아직 진화 중이다. "담임선생의 말을 안 들어서 내가 대신 아이를 실컷 두들겨 팼다"는 그는 담임에게만 무척 친절한 교장선생이다. 여성인 담임의, 차마 궂은일을 대신한 갸륵한 남성교장이다. 교육자란 사회의 지성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교장은 물리적 폭력과 더불어 어떤 언어폭력을 저주처럼 던졌을까? 교육자란 권한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그는 무엇인가? 학생의 부모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가? 아니면 교육청과 교육자가 게와 가재의 사이임을 알았을까? 어떤 경우의 폭력도 정당화되지 않아야 한다. 힘없는 자의 잘못은 조건 없이 과대포장 되고, 힘 가진 자의 잘못에는 조건 없이 관대한 이 사회, 어디로 갈 것인가.  대안학교로 떠난 그 소녀를 나는 잊지 못한다. 죄와 벌의 글씨를 거꾸로 써본다. 내가 그와 동갑인 것이 하도 부끄러워서. 손톱만큼도 부럽지 않은, 그의 이력은 날로 복잡해진다. 이 화 리소설가·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