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몫 챙기기에만 눈이 어두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제몫만 생각하므로 서로 믿지 못하며, 경계하고 맞서면서 이전투구를 불사하기도 한다. 이런 아집은 어리석음이며, 무명이요, 미망이 아닐 수 없다. 욕심의 졸개인 미혹들은 욕심 때문에 살아난다. 미혹이 있으므로 욕심이 생겨 인생은 달콤할 수도 있다. 이게 바로 속세의 오만이다. 그러나 그 첫맛은 달지만 뒷맛은 쓰게 마련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못난 속인이라도 지혜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제몫에만 눈이 어두운 '욕심'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욕심과 욕망들의 도가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금 우리 사회는 제몫 챙기기와 패거리 짓기, 줄서기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원칙이 무너지고,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다. 거짓말과 말 바꾸기, 집단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급기야 우리 사회는 자신과 자신이 소속된 패거리의 이익만 추구하는 삭막한 풍경 속에 내팽개쳐지고, 그 세력 다툼이 창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간다면 우리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편 가르기, 그에 따르는 갈등과 대립은 이미 불안한 차원을 넘어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한탄들도 터져 나온다. 인격이나 능력보다는 같은 패거리만 중시되고, 줄서기가 횡행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가 다시 건강하게 일어서려면 원칙부터 하나씩 바로 세워야 한다. 패거리문화는 그 해악이 머지않아 부메랑처럼 자신과 자신의 집단에게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고 가슴을 열며, 쓴소리에도 겸허해질 수 있어야만 한다.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욕심 덜어내기'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도층부터 깨닫고 솔선해야 한다. 윗물부터 맑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하는 매력과 견인력이 요구된다. 천심이라 할 수 있는 민심마저 저버린 채,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패거리만 중시하려 하기보다 화해와 상생, 나눔과 베풂의 미덕들은 싹 틔우고 가꾸는 아량이 요구된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은 비인간화로 치닫는 '소유양식'이 지배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본래적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존재양식'은 희석되고 밀리는 형국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와 '존재'라는 삶의 두 가지 양태를 테니슨과 바쇼의 시에서 추출하면서 소유양식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갈라진 벼랑에 핀 한 송이 꽃 / 나는 너를 틈 사이에서 뽑아 따낸다 / 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는 테니슨 시의 화자는 꽃을 소유하려 한다. 하지만 꽃은 그 결과 죽어버린다. 시인이 꽃을 소유함으로써 그것을 파괴해버린 셈이다. 바쇼의 경우는 대조적이다. 그는 '가만히 살펴보니 / 냉이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울타리 옆에!'라는 하이쿠를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는 꽃을 꺾으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을 대는 일조차 삼갔다. 다만 바라보면서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만 했다. '소유'와 '존재'의 차이는 '인간에 중심을 둔 사회'와 '사물에 중심을 둔 사회'로 변별된다. 프롬에 따르면 소유를 지향하면 돈, 명예, 권력에 대한 탐욕이 삶의 지배적 주체가 된다. 반대로 존재양식은 소유하지 않고,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세계와 하나 되기에 이른다. 이같이 존재양식은 부단한 자기발전과 자기창조에로 나아가지만, 소유양식은 충족 또는 만족이면서 동시에 자기고정이어서 변화, 모험, 실험 등을 이반한다. 오늘날 우리의 고민과 고뇌는 어디에 뿌리가 내려져 있는 것일까? 아마도 소유양식에로의 기울어짐이 아닐까 한다. 프롬의 주장대로, 그 같은 고뇌를 벗어나려면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방향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우울해진다. 자연은 언제나 하늘을 따른다. 프롬이 말하는 존재양식의 지향도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길에 다름 아니다.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하늘을 따르는 '평상심'으로 돌아간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지게 될까. 그 평상심의 핵은 바로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태 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