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계성중학교 선후배인 김동리와 박목월은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문학수업 동반자로서 우정을 나눈 친구이다. 동리는 경신학교 졸업 직전 경주에 내려왔고, 목월은 계성중학교(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주금융조합 서기로 취직하여 경주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소설가를 지망한 김동리·이기현·김석주, 시인을 지망한 박목월 등이 거의 매일 만나 문학공부를 함께 하며 우정을 쌓았다. 그 후 김동리와 박목월은 소설가와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한국 문단의 거봉으로 우뚝 솟아 있다. 광복 후, 두 분은 '한국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하여 계급문학을 표방한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서 토착적인 민족정서와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문학의 길을 함께 걸어오면서 평생을 가장 친한 친구로 우정을 이어온 것이다. 두 분을 모신 동리목월문학관을 건립한 것도 돌아가셔서도 두 분이 함께 만나시라는 취지에서 한 것이다. 김동리는 1975년 '신라문화제' 백일장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경주에 왔다가 40년 전 사랑했던 한정옥 여인과 다시 만나게 된다. 백일장 고등학생 산문부에 장원으로 입상한 경주여고 학생의 집 '진한여관' 연회장에서 장원 학생의 어머니 안 선생이 심사위원들을 접대하는 자리에 학생의 할머니 한정옥이 나타나 김동리와 40년 만에 다시 만나는 운명적 해후를 하게 된다. 정옥은 그 자리에서 김동리와 박목월의 인연을 다시 상기시킨다. 김동리는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소설 '선도산(仙桃山)'으로 창작한다. 내가 한 여사를 처음 본 것은 서울서 경주 오는 기차간에서입니다. 한 여사는 진명여고 일학년, 나는 경신학교 삼학년, 겨울 방학이었지요. 굉장히 어여쁜 여학생이 책을 보고 있었지요. 슬그머니 가서 보니 춘원의 '무정'이더군요. 난 자꾸 그쪽으로 눈길이가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경주역에 내려서 난 그 학생이 가는 쪽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랬더니 보성고보에 다니는 친구가 나더러 무얼 보느냐고 그래요. 그래 내가 저 여학생 누구냐고, 굉장히 이쁘다고 했지요. 그 친군 히쭉 웃으며 비둣거리 한부자집 막내딸, 너 같은 거 명함장도 못 드린다, 그럽디다. 비둣거리 한부자라면 경주서는 모르는 사람 없었지요. 그렇다면 절망이라고 생각했을 밖에. 그 뒤에도 방학 때 한두 번 더 봤지만 손닿지 않는 높은 가지의 꽃이지요. 그런 지 육 년 뒤 목월 형이, 그때 목월의 호는 소원(素園)입니다만, 경주 금융조합에 있었는데, 목월 형과 같이 있는(조합) 한정식씨와 셋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한정옥양이 문학책을 많이 읽는다고 그래요. 아, 그 미스 한, 여학교 때부터 내 봤는데 굉장히 이쁘더라고 내력 이야기를 했지요, 그랬더니, 아, 그러면 됐다고. 편지를 쓰라고, 자기들이 전해 주겠다고 아마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고, 그래요. 목월은 한정식씨 따라 그 집에 몇 번 놀러도 갔다고 그래요. 이상이 육 년간의 차이와 편지의 내력입니다" 결과적으로 답장을 못 드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문학소녀요, 선생님은 큰 신문에 두 번이나 당선이 되신 작가 선생님이신 데다, 편지를 가지고 오신 분이 또 박목월 선생과 저의 친정 쪽 오빠 벌이 되는 한정식씨 아닙니까. 제가 왜 답장을 쓰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김동리의 선도산에서 목월은 동리에게 한정옥에게 빨리 편지를 쓰라고 여러 번 재촉하여 동리의 편지를 두 번이나 한정옥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러나 아무 소식이 없고, 이따금 거리에서 먼발치로 보는 그 여인의 모습이 동리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40년 만에 만난 한정옥은 "왜 그때 답장을 하지 않았느냐"는 동리의 추궁에 "우리 집은 양반집이고, 그때 집에서는 빨리 시집가라고 독촉하는데 선생님의 편지는 결혼하자는 말도 없고, 화끈하게 사랑한다는 말도 없는데 제가 무슨 답장을 하겠느냐"는 말로 동리를 당황하게 했다. 손녀로 인해 40년 만에 만난 것도 운명이고, 고속버스 주차장까지 어머니 안선생과 손녀가 환송 나온 것도 운명이다. 동리에게 빨리 답장을 하라고 재촉한 목월의 우정도 인간에게 얽힌 운명의 끈이다. 소설 '선도산'은 김동리와 목월의 이야기만이 아닌 경주의 이야기로서 인생의 여운을 담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