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鐘)의 크기는 노장(魯莊)보다 크다오. 조귀의 간(諫)함이 어찌 없었으랴. 다만 천당의 기뻐함을 인연 하여라. 절 없어져 자갈에 묻히게 되니, 이 물건도 초목 속 에 버려졌구나 주(周)나라의 석고(石鼓)와 흡사하여 아이들이 두들기고, 소는 뿔을 비벼되네…. (김시습, '봉덕사종' 매월당집) 생육신(生六臣) 김시습이 그의 매월당집에서 '봉덕사종'을 노래한 글이다.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던 그가 어느 날 봉덕사를 찾는다. '북천' 홍수가 범람하여 봉덕사가 무너지고 세월이 흘러 봉덕사종도 자갈에 묻혀 초목 속에 버려져 있다. 아이들이 종을 두들기고 소가 뿔을 비벼되는, 버려져 있는 우리의 위대한 성덕대왕 신종! 김시습이 묘사한 봉덕사종 모습은 지금 보아도 너무나 쓸쓸하고 가슴 아픈 모습이다. 북천은 신라 때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제방공사를 해도 자주 범람한 하천으로 서라벌 도심의 피해가 막심했던 곳이다 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날, 성동동 '경주세무서'옆 골목. 옛 '봉덕사터'가 있었다는, 설이 있는 '경주세무서'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어디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유명한 봉덕사 절터 일까? 오늘이 마침 '동아국제 마라톤'행사가 우중에도 진행되고 있어 비속에서 마라토너들이 '경주교' 아래를 힘차게 달리고 있다. 북천변의 절이니까 이 근처 절터임은 분명하다. 경주세무서 공사를 할 때 절터의 일부 주춧돌도 나왔다고 전해지는 곳. 나는 신라염색집, 한복전문집 지나 컴퓨터 상가가 들어선 길 위에 선다. 집들이 빽빽이 들어선 성동 골목 어디에도 절터 흔적은 깡그리 사라지고 없다. 폐사지 흔적도 없고 어디에도 안내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이렇게, 정신없이 산다고 이토록 역사의 흔적이 사라지게 내버려 두었을까? 경주 시민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봉덕사의 종은 경덕왕이 선대 임금인 성덕왕을 위하여 만들려다가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던바 그의 아들 혜공왕이 주종한 것이다. 구리로 만든 종의 무게는 12만 근이며, 종을 치면 소리는 100 여리까지 들렸다. 후에 절은 북천에 윤몰(淪沒)되었다. 천수 4년인 경진년(1460년) 영묘사(靈妙寺)로 옮겨서 달았다. 신증 경주부윤 예춘년(芮椿年)이 남문 밖으로 옮겨서 종각을 짓고 매달아 군사를 모집할 때 쳤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 신라 범종의 대표 격인 에밀레종, 이름도 그냥 성덕대왕 종이 아니라 성덕대왕 신종(神鐘)이다. 신종은 뛰어난 조상들의 위대한 유산이다. 특히 신종에 새겨진 한림랑 김필원의 글은 '명문' 중에 명문이다. 범종소리는 불음(佛音), 즉 부처님의 소리, 진리의 소리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걸려있는 성덕대왕 신종 앞에 서면 나는 언제나 경건하고 진지해진다. 종에 새겨진 진리를 향한 진정한 목소리 때문이다. 신라 장인들의 위대한 혼의 소리가 그 속에서 들리는 종이다. 아, 지상에서 사라진 아름다운 절 봉덕사!….어느 가을 맑은 서라벌 하늘아래 청아하게 울려 퍼지던 봉덕사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그 은은한 범종소리 들리는 듯… 몽상에 잠기다, 차들이 윙윙 오가는 북천 길 위에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