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종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교(敎)이다. 예수는 본시오 빌라도 총독이 다스리는 팔레스타나(오늘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이집트로 피난 갔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와 30세에 갈릴레아 호숫가 카파르나움을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예수의 첫 일성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열두 사도(使徒)들을 뽑아 가르쳐서 자신과 같이 하늘 나라를 선포하게 하였다. 그 중 베드로에게 교회를 통치할 전권을 맡기면서 으뜸으로 삼았다. 예수는 3년간의 복음 선포의 공적활동을 마치고 이후 예수를 이어 교회를 다스릴 사도시대의 초대교회가 시작된다. 이 초대교회는 예수가 죽은 후 부활하고 승천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 그 후 사도들은 로마 등 각 지역으로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면서 세계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베드로 사도가 유다인들의 사도였다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의 직제자는 아니었지만 예수의 부름을 받아서 이방인(異邦人)의 사도가 된다. 바오로는 본래 유다인이며 로마 시민으로서 유다문명과 그리스 문명에 정통하여 이방인들의 사도로 활동한다.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까지 복음선포를 하게 된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간다. 베드로 사도는 42년경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61년에 로마로 압송된다. 사도는 로마에서 3년간 머물면서 선교하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64년경 네로 황제 때에 순교한다. 그리스도교는 초기에 로마 제국에 의해 200년간 혹독한 박해를 받게 된다. 유명한 폭군 네로 황제는 로마 시내를 불지르고 난 후 그 죄를 그리스도교인에게 뒤집어 씌우고,박해하고, 다른 황제들도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의 신들을 섬기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박해하였다. 그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의 종교자유칙령을 선포하면서 종교자유를 얻게 되고 로마의 국교가 된다. 대제국이었던 로마에 힘입어 그리스도가 도시화, 세계화되면서 세계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법과 제도를 받아들여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크게 성장한다. 400년경 로마 제국의 7천만 인구 중 1천600만이 그리스도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다가 그리스 동방의 사고와 라틴 서방의 사고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교회에도 영향을 미쳐서 교의(敎義) 신학과 교회 정책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급기야 1054년에 와서 베드로 사도에게 소급되는 교황의 절대적인 수위권(首位權)을 승인하도록 콘스탄티노풀의 총대주교 미카엘 체룰라리오스(1043~1058)에게 요구하였으나 거부하자 로마 교황의 특사인 훔베르트가 파문(破門) 교서를 작성하고 1054년 성직자와 대중이 모인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대 위에 "하느님께서는 판단하실지어다"라는 파문교서를 놓았다. 양 교회의 분열은 교의상의 문제라기 보다도 서로간의 문화의 차이를 이해 못한 비극적인 오해와 인간적인 오해,규율적인 문제에서 기인하였다.이렇게 동방정교회(ORTHODOX)가 탄생한다. 오늘 날의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그 대표적이다. 제2차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300여년이 지나서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가 분열되면서 시작하게 된다. 로마에 유학했던 루터는 중세 중기 이후 교황청의 과세와 행정제도 및 교회의 법제도와 소송제도를 비판하면서 신적인 교회의 제도적인 모습에 불만을 품고 가견적인 교회를 벗어나 영적이고 불가견적인 교회를 지향하였다. 한편 당시의 독일의 모든 종교적, 정신적,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가득차 있던 화약통에 루터의 주장이 불똥을 던진데 불과하였으나 그 파급은 교회의 분열로 까지 이르게 되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명분으로 대사(INDULGENCE)문제와 의화설(義化說),미사와 성사(聖事)에 대한 해석과 특히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95개조의 토의사항을 선언하면서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 하였다. 이런 루터의 주장에 대한 소송이 1520년 로마에서 열렸고 결국 루터의 이단(異端) 확인으로서 끝났다. 루터는 1520년 비텐베르그에서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1521년 그에 대한 파문이 로마에서 정식으로 내려졌다. 분열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의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가톨릭 교회는 개혁공의회(改革公議會)인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18년 동안 열면서 1545년12월 13일 31명의 공의회 교부들과 교황의 특사 3명에 의해 공의회가 개최된다. 황제 측에서는 교회개혁과 프로테스탄트와의 재일치가 목적이었으나 교황은 교회문제의 해명을 그 핵심으로 삼았다. 가톨릭 신학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공격이 심했기 때문에 교회의 신앙요소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게 되었고 1546년 1월 22일 트리엔트에서의 교의와 개혁을 함께 안건으로 다루기로 합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