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중학교 1학년 딸이 끄는 리어카를 타고 그는 매일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위해 어린 딸은 휴학을 했다. 계림으로 향하는 리어카엔 캔버스와 화구, 그림에 대한 열정이 실려 있었다.북천교 부근에서 계림까지 가깝지 않은 거리를 6개월여를 오가며 작품에 혼신을 쏟았다. 수족을 잘 못 쓰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첨성대 위로 내린 별들의 이야기를 덧칠했다. '신(神)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지?'라며 캔버스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 첨성대를 배경으로 한 마지막 그림은 국전에 낙선되었다. 안타깝게도 세 번째 병의 재발로 60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이제 그 딸도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그림을 그리지 말라던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처럼 화가가 되었다. 잘 설정된 드라마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경주 출생 독학 화가 손수택(1919~1978)이다. 경주의 근대미술 1세대 화가 중 한 명으로 해외 유학을 하지 않고 독학으로 학맥이나 인맥 없이 국전에 등단하여 인정받은 작가다. 낙수(樂壽) 손수택은 계림소학교 시절 돌 위에 그린 그림을 본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그림에 대한 꿈을 키웠다.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결혼 후 자녀들을 둔 서른일곱의 늦은 나이에 홍익대 회화과 2 학년에 편입(1955년)해 체계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으나 기대했던 학교교육과는 거리가 있었던지 다음 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경주로 내려와 경주여고에서 강사생활을 몇 년간 한 후 평생을 전업작가로 활동하다가 타계했다. 경주여고 미술강사로 재직 중에는 학생들을 현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성심으로 지도해 여러 학생을 명문대학에 진학시키기도 했다. 주로 경주 주변의 풍경을 그렸으며, 언젠가 꽃밭을 그린 그림을 마당에 세워놓으니 나비와 벌레가 찾아 와 앉을 정도였다고 한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 계림', '낙강'이, 다음 해 제3회 때는 '6월의 서라벌'이 입선했다. 또한 1974년 제13회에서는 '7월의 계림'이 입선되었다. 그의 그림 중 안압지를 배경으로 한 국전 입선작인 '5월의 여왕'을 청와대에서 구입하기도 했다. 1974년 중풍으로 갑자기 쓰러져 왼쪽 팔다리가 마비되어 거동하기 힘든 투병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근대미술사에서 손수택에 대한 연구가 크게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으나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2014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영남의 구상미술 시원과 태동'이라는 학술세미나에서 영남 구상화가의 주역으로 꼽히기도 했다. 또한 2015년 경주솔거미술관 개관전시인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전에 소개되었다. 그는 경주를 지키며 그림을 그렸다. 주로 나이프로 작업을 했는데 유화뿐 아니라 묵화에도 관심을 보여 문인화도 몇 점 남겼다.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 그의 작품들은 성실함과 부단한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다. 어려운 환경과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시대적인 어려움을 극복한 작가로 기억된다. 투병생활 중에도 개인전 준비를 하다가 한 달여를 남겨두고 운명하는 바람에 애석하게도 소박한 뜻마저 이루지 못했다. 그는 비록 그림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진정한 화가로 살다 떠난 경주의 자부심이다. 문득, 신라 시대 황룡사 법당 벽에 소나무를 그려 놓았더니 새들이 날아들었다는 솔거의 '노송도'를 생각하게 한다. 솔거미술관에 그의작품을 걸었으니 그 인연 또한 간단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