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에 '수영 잘 하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나무 잘 타는 사람이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다'고 했다. '총으로 흥 한 자 총으로 망하고', '칼로 흥 한 자 칼로 망한다'고 했다. 늘 법치(法治)를 강조하고, 법을 무기로 삼던 사람들이 그 법의 심판을 받게 되자, 이젠 법을 피하려 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가관이다. 사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범죄의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범인은 처벌 받지 않는다. 즉, '완전범죄(完全犯罪)는 무죄가 된다'는 말이다. 고로 법정의 무죄선고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게 된다. 하나는 죄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무죄이고, 또 하나는 범죄사실을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죄가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양심까지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는 일생동안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형벌 아닌 형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이 나에게 주는 형벌, 타인이 나에게 가하는 학대보다 자학(自虐)이 자신의 심신에 가하는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모를 것이다. '완전범죄'는 당장의 처벌은 면할지라도, 그 부도덕한 완전함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불완전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완전범죄란 절대로 완전하지 않다는 역설이 또 성립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법을 잘 피해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무슨 '꾸라지' 등의 신조어까지 등장했지만,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피해가야 하는 것이 장애물인데, 법이 장애물이라면 법의 존립이유를 다시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법은 도로의 장애물이 아니다. 법은 오히려 도로를 막고 원활한 교통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며, 법은 어느 누구도 임의로 도로를 점거하여 일방통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회적 약속이다. 고로 법을 어기고도 법을 잘 피해 가는 사람들은 공동의 약속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까지 속이며 면피(免避)에만 능한 비겁한 사람들로, 그들의 반 공동체적 행위는 비난 받지 않을 수 없다. 오랜 기간 법을 자신의 전유물처럼 휘두르던 사람들이 자신의 무기에 의해 자신이 다치게 되자, 이젠 법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마치 법이란 자신의 손에 들려 있을 때만 법이고, 타인에 의해 집행되는 법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법리를 복잡하게 펼치며 고도의 전문성을 강변하고, 자신의 전문성으로만 법이 해석되어야 하며, 비전문가인 다른 사람들의 법해석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그런데 법이 정말 그렇게 복잡하고 고도의 전문지식을 가져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면, 특정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법을 우리가 왜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법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합의로 만들어진 약속일뿐이기에 상식의 범위에서 구성원들에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하고, 지극히 보편타당해야 한다는 것이 변함없는 내 생각이다. 그 방대한 법전을 조문 조문 암기해야 법 전문가가 아니며, 또 전혀 그럴 필요성도 없다 할 것이다. 해당 법은 검색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고, 법은 해석하는 자의 주관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리 논쟁을 하는 원인은 법리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법을 사유화 하여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키려는 오만한 법 전문가들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법은 상식이라는 토대 위에 논리라는 뼈대로 세워진 집이다. 논리가 무너지면 법이라는 집은 지탱될 수 없으며, 상식이 사라지면 법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상식에 반하고 논리가 없이 특정인들만의 사익(私益)을 위한 법이야말로 사상누각에 다름 아니며, 자신의 주관에 의한 그 어떤 법리도 태풍 앞에 서있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을 지켜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완전범죄는 사상누각이며, 사상누각은 반드시 허물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완전범죄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