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인 8세기로 올라가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 그리고 신라의 서라벌이 꼽힌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당시 서라벌에 18만 호 가까운 집들이 있었고, 이를 기준으로 서라벌의 인구를 어림잡으면 100만 가까운 사람들이 사는 대도시였다. 이런 이야기는 물론 구체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하였으나 경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이 도시가 한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던 세계적인 도시였다는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믿지도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경주 출신의 화가 이재건은 오랜 세월을 바쳐서 8세기의 서라벌을 그림으로 복원하는 일에 매진했고,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신라왕경도(新羅王京圖)'이다. 신라역사과학관이 소장하고 있고 국립중앙박물관과 경주박물관에서 영인본을 전시하고 있는 이 그림은 가로 2.5m 세로 6m의 대작으로 1992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1994년에 완성했다. 우리는 이재건의 '신라왕경도'를 통해 단지 인구만 많은 도시가 아닌, 계획도시 서라벌의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집과 집 사이에 반듯하게 난 길들, 골목마다 출입문이 있고, 돌을 쪼아 세운 탑과 쌓은 성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에라도 신라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한 착각에 빠진다. '신라왕경도'는 순수회화가 아니라, 역사학적으로 고증되어야 할 그림이므로 이재건은 수많은 자료를 연구하고,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학 등의 관련 저서들을 참고했다. 그리고 남산을 비롯해 경주의 골목골목을 수없이 돌아다니며 직접 스케치했다. 경주의 역사를 공부하려는 사람은 이 그림을 보지 않고는 불가능할 만큼 표본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경주의 교과서라 해도 손색없는 역사 자료인 셈이다. 이재건은 '신라왕경도'뿐 아니라 회화적 가치와 역사 문화적 자료의 가치를 동시에 갖는 최초의 회화지도인 '경주남산유적도'를 완성하기도 했다. 또 2004년에는 '경주읍성도'(경주문화원 소장)를 완성했는데, 이 그림은 경주 고대도시의 환경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 역할을 하고 있으며, 현재 한창 복원되고 있는 경주읍성의 중요한 토대이기도 하다. 화가 이재건(1944~2014)은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경주에서 계림초, 경주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또 홍익대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계명대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고고학과 미술비평에도 관심을 가져서 이 방면의 권위 있는 교수로부터 별도의 수업을 받기도 했다. '신라왕경도'를 비롯한 회화지도들은 그의 이런 학업들을 바탕으로 제작된 셈이다. 그는 또 1970년대 중반 이후 경주에 정착하면서 미술연구소를 개설해 후진을 양성하고, 후배들과 청년미술그룹을 결성해 활발한 창작활동도 펼쳤으며, 경주미술협회 회장도 지냈다. '현대미술론과 중국수묵사상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미술이론에 대한 논문들을 여러 매체에 기고했다. 젊어서는 서울에서 현대미술 계열의 작업을 주로 했다. 그러다가 경주에 정착한 이후로는 경주의 감성이 묻어나는 작품들에 매진했다. 그는 특히 "예술은 지성이다"는 화두를 붓으로 펼쳐낸 화가로도 유명하다. 과거의 경주를 넘어 현실과 미래의 경주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 그는, 경주 구경을 좀 더 뜻 깊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작업을 하고 싶어 했다. 소중한 문화자산들이 훼손되고 사라져버리는 것을 누구보다 아파했다. 2008년에는 '꿈과 시를 담은 서정적 풍경'이란 주제로 '내 마음의 풍경화'라는 유화 개인전을 열었다. "화가는 자신의 꿈을 파는 직업"이라고 믿었던 그는, 형식이나 재료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래서 사실 묘사에서 추상화까지, 또 정물에서 서정적 풍경까지 마음 닿는 대로 넘나들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꿈과 시를 담으려는 의식세계를 구축했고, 이를 회화로서의 본질이라고 여겼다. 그의 지성과 감성은 나아가 삶을 또 그렇게 예술의 혼으로 불태웠다. 그는 자신의 육신을 동국대 의과대학에 기증함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삶조차 아름다운 그림 한 점으로 새기고자 했는지 모른다. 평생을 그림 속에서 살던 사람, 이재건은 그렇게 마침내 그림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경칩이 지난 서라벌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알고 있을까? 우리가 거닐고 있는 이 서라벌의 거리거리마다 어쩌면 위대한 예술의 혼들이 충만하게 거닐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