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먹었냐?" 거동이 불편한 아흔넷의 선생님은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를 그렇게 따뜻한 말씀으로 맞아주었다. 목련이 활짝 핀 마당에는 처음 선생님을 만난 그때처럼 봄이 가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을 떠나 진학과 취업을 한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꺼낸 이야기 속엔 늘 선생님의 함자가 들어 있었다. "이종룡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노?"  고향을 멀리 두고 살아가는 녀석들은 고향의 하늘을 볼 때마다 선생님의 추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마치 고향 하늘을 바라보면 늘 반짝반짝 빛나는 이름 모를 별 하나가 그들의 가슴속에도 빛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어두운 밤이 오거나 찬바람이 불 때면 아마 녀석들의 귀에도 "저녁은 먹었냐?"라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말씨는 내가 살아 온 이 지역 사람들의 억양과 달랐다. 나는 선생님의 말씨에서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선생님의 세월과 선생님이 건너 온 우리 현대사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하도 아득하고 깊어서 때로는 눈물 같은 뭉클함이 맺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가르침은 권위를 가진 말씀이 되어 우리를 무르익게 만들었다. 그 억양의 출처가 한반도의 이북, 나라의 경계가 있는 함경도의 말씨란 걸 깨달은 건 내가 제법 머리가 큰 뒤였다.  선생님은 1924년에 온천으로 유명한 함경북도 주을에서 태어났다. 청진교원대학을 나와 장진 상남중과 장진여중에서 가르치다가 전쟁터에 내몰려 이남으로 내려왔다. 강원도 횡성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경주 18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이때부터 선생님의 터전이 경주가 되었다. 국문과를 나온 선생님은 1953년 휴전 이후부터 경주중학교와 경주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여 1990년 퇴직할 때까지 그야말로 평생을 국어를 가르치는 교육자로 사셨다.  선생님은 글을 짓는 재주도 남달라 18육군병원에서 문관으로 근무할 때는 '18육군병원가'를 작사하여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밖에도 '수연가' '동향인' 등 선생님이 쓴 글에 신윤원 선생님이 곡을 붙인 노래들이 있으며, 천주교회가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인 <경향잡지(京鄕雜誌)> 등에도 기고했다. 1955년 봄에 청마 유치환 시인이 경주고등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해 오면서 경주에 문학 바람이 불었는데, 이때 경주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청맥동인회'가 결성되었다. 문향 경주를 청보리 물결로 넘실대게 했던 이 바람 속에 선생님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선생님은 쪽샘 골목에서 밤을 지새우며 동지들과 문학의 열정을 불태우던 그때를 여전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선생님은 그 무렵 한국문인협회 경주지부의 창립회원으로도 참여했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예총 경주지부에서 사무국장 등으로 일하며 신라문화제를 비롯한 지역의 문화행사들을 치렀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75년부터 1998년까지 한림야간중고등학교를 섬긴 일이다. 교육의 기회를 놓쳐버린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 무료로 개설된 이 학교에서 선생님은 초대 교장을 맡아 일했다. 이때 선생님에 얽힌 아름다운 스승의 이야기는 KBS TV 등으로도 소개되었는데, 지금은 이 지역 교육계의 오래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베를린올림픽의 영웅 손기정 옹이 살아계실 때 양정고보 시절을 추억하며 자신에게 마라톤을 가르친 김교신 선생님을 그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시험을 치르다가 부정행위를 한 제자의 앞날이 슬퍼서 아이들이 보고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며 울던 선생님, 올림픽 대표를 뽑는 마라톤대회에서 제자가 선두에 나서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선생님, 바로 김교신 선생님이 계셔서 오늘의 자신이 있었다고 손기정 옹이 고백했다. 옳다. 하늘의 별처럼, 인생의 스승을 두고 살아가는 이들은 복이 있다. 아마도 우리 시대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들 중 하나는 스승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지 싶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좋은 봄날, 여전히 성서를 필사하고 계신 선생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은 행복하고도 고맙다. 삶으로 노래하고 시를 쓴 선생님이 여전히 등대처럼 불 밝히고 있음은 그 무엇보다 삶의 희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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