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 조직에 종사하는 자는 내·외 어떤 일이든 그 도모함에 있어 그에 작용해 오는 요소 변수와 그것이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항상 입체적으로 접근하고 살피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물이라는 하나의 객체를 인식함에 있어서도 4가지의 견해가 있다는 의미로 일수사견(一水四見) 또는 일처사견(一處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물을 보되 인간은 마시고 씻는 '물'로 인식하고 물고기는 자기들이 사는 '집'(또는 공기)으로 여기며 하늘의 천인들은 '보석'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지옥 아귀들은 '피고름'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을 '물'로 인식하는 것이 우리 인간을 비롯한 육상의 포유류 등 일정 생명체들이 공유하는 주관적 인식이지 절대 객관의 인식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물이라는 하나의 객체를 두고 이름하는 집단적 인식은 인식을 공유하는 집단의 집단적 표상일 뿐이다. 아가미로 호흡하는 물고기들에게 물은 분명히 그들의 '거주 공간'일 뿐이다. 주관의 아집을 떠나 절대적 객관의 차원에서 보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임과 동시에 산이 산 아니요 물이 '물' 아니기도 한 것이다.  시각을 좁혀서, 같은 마시는 '물'이라도 그 활용과 용처 또한 전혀 다를 수가 있다. 산양과 독사가 똑같은 골짜기의 물을 마시고 살지만 각자 생산해 내는 산물은 똑 같지 아니한 것이다. 금속공학자들에 의하면 세상에 제일 강한 것이 물이라고 한다. 쇠를 가장 깨끗하게 자르는데 물이 쓰인다고 하니 이해하기 어렵지만 납득은 된다. 여기서 물은 마시는 것이 아니라 금속 칼보다 강한 칼이 되는 것이다. 울산광역시 행정부시장으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전국적으로 고속철도(KTX) 사업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새로 개통할 역 명칭들도 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 울산 KTX 노선은 경주를 지나 관내 울주군 지역을 통과하여 부산으로 가는 것이다. 울산 KTX 역 명칭 제정을 위해 구성된 자체 '역 명칭 선정 위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논의와 여론조사까지 거친 결과 '울산역'으로 잠정 결정되었다. 시내 동쪽에 위치한 기존의 울산역은 그 전통의 이름을 신생 KTX에 양보하고 '태화강 역'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울주군에 인접한 경남 양산시 측에서 그 관내 북쪽에 위치한 통도사(通度寺)가 KTX역에서 가까우므로 역 이름에 통도사가 표시될 수 있도록 예컨대 '울산역·통도사' 등 어떤 형태로든 병기 또는 추가해줄 것을 협조 요청해 왔다. 이에 대해 울산 측의 반응은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명칭 자체에 대해 '울산의 것'만 붙이고 싶은 일종의 지역 이기적(?) 정서에다 역 이름은 간단명료해야 한다는 형식적 논리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검토 과정에서 통도사 방문 편의뿐만 아니라 울산과 양산 두 자치단체 간의 대승적 협조 차원에서 역 명칭을 '울산역(통도사)'로 하여 중앙(한국철도공사 역 명칭 선정위원회)에 건의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역 기독교계에서 강한 반대가 제기되었다. 공공시설 명칭에 특정 종교시설 이름이 붙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광역시 공직자 우리는 깜짝 놀랐다. 그 동안의 논의 진행과정에서 통도사 자체를 오직 하나의 국보 명승지 자산으로 인식해 검토했기 때문에 이처럼 특정 종교시설로 보는 관점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역 명칭에 대한 중앙의 심의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기독교계의 집단방문·농성·방송국 성명 등 강한 저지로 인해 몇 번이나 보류되는 등 된 힘든 과정을 거쳐 결국 울산역 역사 현판과 하차 안내표시·티켓 등에는 통도사를 표기하되 출발지 전광판 등에는 표기하지 않기로 하는 절충안으로 겨우 통과되어 오늘의 '울산역(통도사)'가 된 것이다. 역 명칭 제정과 관련되어 국내 지역 간 갈등 사례가 많지만 동일 지역 내 종교적인 시각 등 인식에 따른 갈등 사례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일수사견이요 각물각견(各物各見)인 것이다. 우리의 현상계 내 인간끼리도 얼마든지 서로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절대 주관도 절대 객관도 없는 것이다. 조직인 특히 공조직인은 언제나 차원 다른 시각과 인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일이 전혀 다른 이해에 관계되고 예상 못할 상이한 반응과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수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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