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교시절에 나무를 고사시키는 두충을 잡기 위해 전교생이 집게와 봉지를 가지고 입산하여 나무벌레를 잡았다. 한 마리 두충이라도 방치하면 그들이 번식하여 온 산천의 나무를 죽이기 때문이다. 두(蠹)는 나무속에 기생하는 ‘굼벵이’ 혹은 ‘좀’이며, 『좌전(左傳)』에 ‘국민지두야(國民之蠹也)’라는 구절과 같이 사물을 좀먹어 해독을 끼치는 사람이나 사물을 뜻하기도 한다. 이 두(蠹)자는 ‘곤(虫虫)’과 ‘탁(橐)’이 결합한 글자로서, 곤은 곤충 즉 충(蟲)의 총명이고, 탁은 주머니의 뜻이다. 그래서 두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곤충을 총칭하는 말이며, 나무를 파먹고 집을 만들어 그 나무에 기생하는 굼벵이나 좀이 두라는 것이다. 나무를 파서 먹으므로 좀 자신은 잘 살아 갈 수 있지만 나무는 끝내 죽고 말기 때문에 두를 잡기 위해 약을 뿌리고,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호조치를 취한다. 나무에 기생하는 좀은 여러 방책으로 잡거나 예방을 할 수 있지만 국민의 좀과 같은 인간이 민주국가의 대표가 된다든가 조직의 책임자가 된다면 그 자신은 국민을 마치 두가 나무를 식취(蝕取)하여 기생하는 것처럼 국민에 기생하여 부귀영화를 누릴지 모르나 국민은 좀의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여 종국에 가서는 그 기생에 의해 불이익과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 기생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생활하지 못하고 남의 힘을 빌리거나 또는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이며, 다른 동식물에 붙어서 영양분을 얻어 사는 것이다. 삶은 가치가 부여된 생의 의미인데, 그 가치가 기생에 둔다면 삶의 주체는 국민의 두가 되어 도적과 같은 존재로 평가받기 쉽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 선생은 도적이 된 것은 비록 그들이 흉악해서이기도 하지만 이를 초래하게 한 것은 위에서 반드시 실정(失政)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지구(止寇)와 역적의 제거 방법으로 성리학적 경세론에 입각한 도덕적 치화(治化)를 주장하였다. “역적을 제거하는 근본이 덕을 닦음에 있고 도둑을 금지하는 요점이 안민 즉 백성을 편안하게 함에 있으니, 수덕이 되면 역적이 저절로 나오지 않고 안민하면 도둑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하여 도덕주의 바탕에서 수기치인의 논리에 따른 정치를 역설하였던 것이다. 덕을 닦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이 높고 먼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공손하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부화(浮華)를 절제하고, 덕화를 돈독히 하여 형벌과 살인을 줄이며 간략하고 고요함에 힘써 번거로움과 소요를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대권에 뜻을 둔 사람들은 더욱 명심해서 새겨할 위정대의(爲政大義)라 생각된다. 특히 여헌 선생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한 마리의 좀 벌레’로 자칭하고 헌호(軒號) 역시 ‘나그네(旅軒)’라 겸손하게 지은 신 것은 오늘날 자숙하지 않고 자신을 마치 전능한 신적 존재처럼 떠벌리며 지나치게 표현하는 행동을 볼 때 교훈적 의미를 전해주는 것 같다. 대권주자들이 위대한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재조산하(再造山下)를 외치지만 혹여 국민들은 일두(一蠹)가 없는지 엄격히 가려서 스스로 두의 피해를 막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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