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으로 불리는 '문천(蚊川)'은 모래가 하도 부드러워 물은 아래로 흐르지만 모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보인대서 문천도사(蚊川倒沙)라 불리며 신라시대 삼기 팔괴 중 하나로 전해졌다. 나는 지금 남산 옥돌이 깎여 내린 금빛모래가 전설처럼 반짝이는 그 문천을 건넌다. 개울을 따라 옥룡암까지 이어졌다던 갯버들이야 하천을 정비한 바람에 찾아보기 어렵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꽃구경 나온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골목마다 깔깔거린다. 그래서일까. 고청 윤경렬(1916~1999)이 '꿈의 마을'이라 불렀다는 인왕동 양지마을에는 오늘도 꽃비가 흩날린다.  이 마을에 산신령처럼 사는 윤경렬의 고택이 있다. 드나드는 학생들을 위해 마루를 크게 낸 이 고택에 들어서면 구불구불 흰머리에 흰 두루마기와 고무신 차림의 '남산할배' 윤경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선생은 함경북도 주을에서 났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이야기꾼이었다. 주을에서 길주까지 오가는 등하교 길에 어린 윤경렬은 전날 읽은 동화를 맛깔스럽게 구연해서 아이들을 몰고 다녔다고 한다. 서울에서 영화관 그림을 그리던 큰형님이 보내준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나라' '사랑의 선물' 같은 책이 어린 이야기꾼의 웃음보따리였다. 얼마나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 풀어냈던지 그 솜씨에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까지 웃음꽃을 피웠다고 한다. 윤경렬이 그때부터 마음을 둔 것이 흙으로 만든 인형 토우(土偶)였다. 토우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자 일본까지 다녀왔으나 당시 개성박물관 고유섭 관장으로부터 모진 소리를 들으며 혼쭐이 났다. "일본 놈의 독소를 빼기 전에는 조선 것은 해볼 생각도 마라" 그때 고유섭 선생이 윤경렬에게 제안한 말이 그의 발길을 경주로 향하게 했다. "신라를 알고 싶으면 경주에 가서 살아라. 겨레의 혼을 알고 싶으면 서라벌의 흙냄새를 맡으라. 그리고 한국 불교의 원류를 찾으려면 경주 남산에 가 보아라" 그 길로 윤경렬은 경주에 닿았고, 그 지경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 내 뼈를 묻으리라' 결심했다 하니 아마도 전생에 그는 신라인이었던 것일까.  선생은 경주에 살면서 한국풍속인형연구소인 고청사를 설립하여 신라의 토제 인형 곧 토용과 토제 완구들을 제작했다. 신라의 토용은 흙으로 빚고 구워 회칠을 하거나 호분으로 채색했다. 우리 것을 만들고자 하는 선생의 의지로 말미암아 단절된 토용의 맥이 비로소 이어진 셈이었다. 선생은 경주예술학교의 강사로도 활동했다. 1954년 6·25 직후의 그 어려운 시기에 당시 경주박물관장이던 진홍섭과 함께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을 열었다. 박물관장실을 교실로 삼아 매주 수업을 했다.  선생의 이런, 어린이들을 위한 향토역사교실은 동양 최초로 일본조차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이었다. 재독 음악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린 윤이상이 작곡하여 더 유명한 이 학교의 교가는 윤경렬이 작사했는데 노랫말처럼 "겨레의 고운 얼 길러준 뿌리"로 어린이 문화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그때 이 학교를 다닌 어린이들이 장성하여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우리 문화 지킴이와 길잡이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956년 선생은 뜻있는 이들의 힘을 모아 경주의 문화를 공부하고 새기려는 다짐으로 신라문화동인회를 만들었는데 이 모임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천박물관이라 불리는 남산을 보전하고자 신문에 남산 이야기를 연재했는데, 선생은 수없이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120곳이 넘는 절터를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또 '경주남산고적순례' '불교동화집' '신라이야기' '경주 남산' '신라의 아름다움' '겨레의 땅 부처님 땅' 등 수많은 경주의 이야기들을 책으로 펴냈다. 이런 공로로 선생은 동아일보 해님어린이 보호상, 외솔상, 한국문화예술상, 경주시문화상, 금복문화예술상, 대한민국 문화보국훈장을 수상했다.  평생을 마치 신라의 수문장으로 살면서 서라벌의 맥을 잇고자 노력한 선생은, 죽어서도 남산의 수호신이 되리라 했다. '옛날 속에서 푸르게 산다'는 의미로 호를 고청(古靑)이라 했던 남산 할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문천과 남산에도 푸르름이 더해가고 있다. 고청기념관을 준비 중인 비닐하우스 안에서 듣는 빗소리가 문득 묻는다.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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